윤동주 묘

한자 尹東柱 墓
중문 尹东柱墓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묘지
관련인물 윤동주
조성 시기/일시 1945년 3월 6일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917년 12월 30일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945년 2월 16일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5년
개축 시기/일시 1988년
현 소재지 길림성 용정시 광신진 합성리동산 공동 묘지
원 소재지 길림성 용정시 광신진 합성리동산 공동 묘지
정의

길림성(吉林省) 용정시(龍井市) 광신진(光新鎭)합성리(合成理) 동산 공동 묘지에 있는 일제 강점기의 저항시인 윤동주(尹東柱)의 묘.

개설

운동주 묘는 윤동주[1917~1945]가 일본 유학 중 항일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투옥 중 순국하자 그의 유해를 옮겨다 안장한 묘소이다. 윤동주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자기의 시와 삶을 바친 저항시인으로, 1917년 12월 30일 화룡현(和龍縣) 명동(明東)에서 출생하였다. 1942년 10월 일본경도(京都)의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재학중 유학생들과 회합의 기회에 민족 독립 사상을 선양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려 시도한 것이 죄가 되어 1943년 7월 19일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 이듬해 3월 31일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 형의 언도를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2월 16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위치

용정시에서 명동촌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광신진합성리 동산 공동 묘지가 보인다. 이곳에 윤동주윤동주의 고종 사촌형인 송몽규의 묘가 있다.

변천

후쿠오카 형무소로부터 윤동주의 사망 전보를 받은 아버지 윤영석과 삼촌 윤영춘은 일본으로 가서 윤동주의 유골을 안고 돌아왔다. 윤동주의 장례식은 1945년 3월 6일 용정의 생가 앞뜰에서 거행되었으며, 용정 중앙 장로 교회문재린 목사가 식을 주관하였다. 장례식이 끝난 후 윤동주의 유골은 용정 중앙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1945년 6월 14일에는 ‘시인 윤동주 묘’라고 새긴 비석을 무덤 앞에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윤동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해 1980년대 들어서는 묘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때 윤동주의 묘를 수소문한 사람은 일본와세다 대학 어학연구소에 근무하던 오무라[大村] 교수였다. 1985년 8월 오무라 교수는 연변대학에 와서 명동촌에서 출생한 윤동주가 용정과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우수한 시(詩)들을 많이 썼다는 것과 일본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용정 동산 중앙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해 가을 오무라 교수와 연변대학 교수들은 수차례 답사한 끝에 운동주 묘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1988년 8월 운동주 묘소가 새롭게 단장되고 용정 중학교 2층에 ‘용정 중학 역사 전람관’이 세워지면서 윤동주와 관련한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형태

합성리 동산 공동 묘지 중앙 지점에 ‘시인 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금석문

비석은 1945년 6월 14일 김석관의 비문과 함께 세워졌다. 비문의 내용은 한문으로 쓰여져 있는데 이를 한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아아. 고 시인 윤동주는 본관이 파평이다. 어릴 때 명동 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화룡 현립 제1교 고등과에 들어가 배웠고, 용정은진중학에서 3년을 배운 뒤 평양 숭실 학교에 전학하여 학업을 쌓으며 1년을 보냈다.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광명 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1938년 연희 전문 학교 문과에 진학하여 4년 겨울을 보내고 졸업했다. 학업을 이미 이루었으나 오히려 학업에 뜻이 남아서 다음해 4월 책을 짊어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京都)동지사 대학부에서 진리를 갈고 닦았다. 그러나 어찌하랴. 배움의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 몸이 자유를 잃으면서 배움에 힘쓰던 생활은 변하고 조롱에 갇힌 새의 처지가 됐고 거기에 병까지 더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운명하니 그때 나이 스물아홉, 그 재능이 가히 당세에 쓰일 만하여 시로써 장차 사회에 울려 퍼질 만했는데 열매를 맺지 못하니 아아 아깝도다. 그는 하현 장로의 손자이며 영석 선생의 아들로서 명민하여 배우길 즐긴 데다 새로운 시를 지어 작품이 많았으니 그 필명을 ‘동주’라 했다.

1945년 6월 14일

해사김석관 짓고 쓰다.

아의 일주광주 삼가 세우다.

현황

매년 청명(淸明) 때 윤동주의 묘소에는 그를 기리려는 많은 사람들이 참배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윤동주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노래하여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저항시인이다. 그의 시는 당대에 많이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윤동주와 관련된 사적지가 널리 알려지면서 용정 지역의 한인들의 삶과 독립운동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윤동주의 묘소를 비롯한 유적지는 단순히 윤동주 개인 행적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한인들의 애환과 노력을 알리는 대표적인 사적지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강용권, 『죽은 자의 숨결, 산 자의 발길』(장산, 1996)
  • 「鄕里 龍井서 尹東柱 추모 모임 활발」(『동아일보』, 1989.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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