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면

한자 鄭載冕
영문 Jeong Jaemyeon
중문 郑载冕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종교인|독립운동가
성별
대표경력 명동학|교사|간민교육회총무|조선독립기성총회 의사부원(議事部員)|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북간도 특파원|용정시 시민대회|기독공보 사장
출생 시기/일시 1882년 2월 14일
수학 시기/일시 1907년
활동 시기/일시 1909년
활동 시기/일시 1910년 3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2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
활동 시기/일시 1919년 8월 15일
활동 시기/일시 1920년 1월
활동 시기/일시 1920년 3월
몰년 시기/일시 1962년
출생지 평안남도 평원
거주|이주지 북간도 용정(龍井)
학교|수학지 한성
활동지 길림성 연길
활동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활동지 북간도
활동지 상해
정의

일제 강점기 북간도와 상해, 러시아연해주 일대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활동 사항

정재면은 평남 평원(平原) 출신으로 1882년 2월 14일에 태어났다. 호는 벽거(碧居), 일광(一光), 우산(雨山)이며 이명은 병태(秉泰)다. 1907년 서울상동 교회(尙洞敎會) 부설 기독교 청년 학원을 졸업하고, 1909년 북간도 용정(龍井)의 명동학교(明東學校) 교사로 초빙 받아 만주로 건너가서 육영 사업에 전념하였다. 특히 그는 기독교 신자로 교장 김약연을 기독교에 입교하도록 하여, 명동학교를 기독교와 민족 의식을 연결한 근대 교육 기관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북간도 일대의 교민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중국 정부와 협조하여 1910년 3월 간민 교육회(墾民敎育會)[간민회(墾民會)]를 조직하고 총무로서 교민 사회의 자치활동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간민 교육회는 강력한 자치활동을 통해 항일민족 운동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활동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한인 사회를 조직화하는 한편, 한인들의 민족 의식 고취와 경제력 향상에 주력하였다. 설립 시의 주요 인물은 정재면을 비롯하여 이동춘(李同春)·이봉우(李鳳雨)·구춘선(具春善)·박찬익(朴贊翊)·윤해(尹海) 등이었다.

1919년 2월 연해주에서 열린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에 김약연(金躍淵), 이중집(李仲執)과 함께 북간도 대표로 파견되었다. 1919년 3월 21일 조선 독립 기성총회(朝鮮獨立期成總會)에 명동촌(明東村) 대표로 의사부원(議事部員)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8월 15일에는 임시 정부 내무부북간도 특파원에 임명되어 활동하였으며, 1920년 1월에는 상해에서 열린 중한 노공 동맹 연합회(中韓勞工同盟聯合會)에 기독교계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0년 7월 8일 임시 정부에서대한 국민회북로 군정서 등 간도 지역 독립군 조직 통합을 위해 안정근(安定根) 등을 파견하자, 여러 단체들의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통합 방안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북간도의 한인들을 위한 활동이나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1923년 2월에 한인 청년 1명이 중국 군경에 의해 사살된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용정시 시민 대회를 개최하고 윤화수(尹和洙)·김정기(金正琪)와 함께 외교 위원이 되어 연길 도윤(延吉道尹) 도빈(陶彬)을 만나 공식적으로 항의하면서 교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합법적인 운동을 전개하겠다는 뜻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 서울로 귀국하였고, 양주시 장흥면 인근에서 목사로 활동하였다. 1962년 별세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김승학, 『한국독립사』(독립문화사, 1966)
  • 『한국독립운동사』3 (국사편찬위원회, 1967)
  • 『독립운동사』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 윤병석, 『국외한인사회와 민족운동』(일조각, 1990)
  • 박주신, 『간도한인의 민족교육운동사』(아세아문화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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