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許亨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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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 Huh Hyeongsik |
중문 | 许享植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흑룡강성 하얼빈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성격 |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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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대표경력 | ‘간도 5.30’ 봉기|주하 반일 유격대|동북 인민 혁명군 제2단장|동북 항일 연군제3로군 총참모장 |
출생 시기/일시 | 1909년 11월 18일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5월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10월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활동 시기/일시 | 1936년 |
활동 시기/일시 | 1939년 |
몰년 시기/일시 | 1942년 8월 3일 |
추모 시기/일시 | 1988년 10월 20일 |
출생지 |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 |
거주|이주지 | 요령성(遼寧省) 통화현(通化縣) |
거주|이주지 | 흑룡강성(黑龍江省) 빈현(賓縣) 가판참(枷板站) |
활동지 | 흑룡강성 빈현 가판참 |
하얼빈 | |
흑룡강성 빈현 | |
흑룡강성 주하 | |
길림성 반석현 | |
길림성 | |
북안성(北安省) 경성현(慶城縣) | |
기념비 | 칭쏭링 입구 |
일제 강점기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펼쳤던 독립운동가.
허필(許苾)[1855~1932]의 아들이며, 한말 의병장 왕산허위(許蔿)[1855~1908]의 종질이기도 하다.
허형식(許亨植)은 1909년 11월 18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에서 태어났다. 1915년 부모를 따라 만주 요령성(遼寧省)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였다.
허형식은 흑룡강성(黑龍江省) 빈현(賓縣) 가판참(枷板站)으로 이사한 1929년 경부터 사회주의 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그해 5월 ‘간도 5·30 봉기’에 참가, 일본 영사관 습격에 앞장섰다가 중국 경찰에게 체포되어 심양 감옥에서 1년 정도 복역하기도 하였다.
1931년 출옥한 허형식은 빈현 특별 지부 위원이 되었고, 1932년 1월에는 빈현의 선전위원이 되었다. 1933년 10월 주하(珠河) 반일 유격대 건립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1934년 6월 28일 주하 반일 유격대를 동북 반일 유격대 합동(哈東) 지대로 재편성할 때에 제3단 정치지도원이 되었으며, 그 해 가을에 제1대대 대대장이 되었다.
1935년 1월 허형식은 합동 유격대가 동북 인민 혁명군 제3군 제1사로 편성되자 제2단(연대)장이 되었으며, 3월 일본군의 춘기 토벌에 대항해 유수하자(柳樹河子) 전투, 소량수하자(小亮水河子) 전투에 참가했다. 1936년부터는 동북 항일 연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 의동 판사처(依東辦事處) 주임, 제9군 정치부 주임, 제3군 제1사 사장, 서북 임시 사령부 총참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9년 동북 항일 연군 제3로군이 편성되자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산하 제3군장, 제3로군 총참모장 겸 12지대 정치 위원 등도 역임하였다. 그밖에 중국 공산당 북만성 위원회 집행위원 겸 눈해 지구 대표단(嫩海地區代表團) 부지휘, 용남 지휘부(龍南指揮部) 등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1941년 허형식은 일본군과 맞서 제9, 12지대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계속하였다. 1942년 8월 3일 북만주 경성현(慶城縣)에서 일본군과의 전투 중 전사했다.
1998년 10월 20일 중국흑룡강성 경안현 당국이 청송령 입구에 기념비를 세워 추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