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金永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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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 金永东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흑룡강성 하얼빈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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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대표경력 | 군자금모금|전라북도 농회장 |
출생 시기/일시 | 1903년 6월 10일 |
수학 시기/일시 | 1928년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4월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대 초반 |
활동 시기/일시 | 광복 이후 |
몰년 시기/일시 | 1988년 11월 |
출생지 | 전북 정읍군 응동면 용호리 |
학교|수학지 | 동경 간다 니시키초 |
활동지 | 국내 |
활동지 | 국내와 만주 하얼빈 |
활동지 | 전라북도 |
묘소 | 전북 정읍시 화신공원 |
1930년대 국내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영동의 부인인 서복순은 서재필의 6촌 여동생이다.
김영동은 14세 무렵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1928년 일본 중앙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국내로 돌아와 곧바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일경에 체포되어 1928년 4월부터 2년간 해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0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김영동은 고려 혁명당 집행위원이었던 류동열의 영향을 받아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군을 규합하고, 군자금을 모으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다시 중국에 돌아와 취원창과 전가전을 오가며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 투옥되었다가 한국으로 이송되었다. 서대문 형무소에 2년 8개월 간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광복 이후 군수로서 수년간 일하였고 이후에도 전라북도 농회장 등을 역임하다가 1988년 11월 사망하였다.
김영동 묘지(전주화신 공원) 비석에 1932년 1월에 그가 지은 한시를 새겨 놓았다.
김영동의 아들 김연규가 자신이 경영하는 전라북도 정읍시화신 공원 묘원에다 부모의 묘지를 두었다. 김연규는 독립 기념관을 지을 때 채석가공한 화강석 3억 원 상당의 화강석을 기증하기도 한 인물이다. 묘지 중앙에는 김영동의 간략한 이력을 새긴 비석이 있고 왼쪽에는 김영동이 1932년 1월에 쓴 한시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려운 객손 고향집 가볼 수 없고
앞길을 생각하니 마음만 답답하도다
오늘까지 분주한 떠돌이 해놓은 일 무엇이냐
인간세상에 늙은 이 몸 참말로 가소롭도다
용감한 사람은 슬픔과 걱정이 없다지만
심산에 이 몸을 맡기니 근심이 드는구나
외로운 몸 고향생각에 말보다 눈물이 앞서건만
슬픔을 머금고 남쪽 천리길 떠난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요 의리는 돌아올 것이다
내 몸 바쳐 어지러운 세상 뒤엎으리라
한 번 죽어 봄이 와도 충의는 살아있으리
태조릉의 송백은 오늘도 변함이 없도다
가난한 집 떠나 늙어서 고향으로 돌아오니
고향 사투리는 그대로지만 귀밑머리 희여졌네
어린 아이들 나를 만나도 누군지 모르니
청객 손은 어데로부터 왔는가 물어보구나
저승에 머무를 곳이 하나도 없다면
오늘밤 누구의 집에서 숙박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