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천교

한자 侍天敎
중문 侍天教
분야 종교/신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종교단체
설립자 이용구
관련단체/인물 천도교|일진회|김연국|송병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6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10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1년 5월
정의

1906년 이용구(李容九)천도교에서 출교된 뒤 창시한 종교.

개설

이용구는 일찍이 천도교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나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고 친일 행각을 벌이게 되자 1905년 천도교로부터 출교를 당했다. 이에 이용구는 원 천도교 대도주 김연국(金演局)과 손을 잡고 자신을 따르던 박형채(朴衡采)·권병덕(權秉悳)·송병준(宋炳畯) 등과 신도를 모아 1906년 천도교에 대항하여 시천교를 창시하였다.

일제의 침략과 궤를 같이하여 시천교만주에서 포교 활동을 진행하면서 친일 사상을 고취하고 교세를 확장하였다. 일제의 배경을 힘입어 한때 1만 여의 신도를 모을 만큼 세를 확장하기도 하였으나 간도 협약 체결 이후 만주 지역에서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급격히 세를 잃었으며, 이후 작은 부침을 거치며 만주 지역 한인 사회 내의 군소 교단으로 존속하다가 해방 이후 소멸되었다.

조직구조

시천교의 조직기구는 중앙 공회(中央公會)를 두고 주임 종무원→종무장→과장→종리장(宗理長)→대도사→도사→선도사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 종무부에는 대도사, 종리장, 서무 과장, 포덕 과장, 경리 과장, 감찰 과장을 각 1명씩 두며 소수의 사서(司書)를 두었다.

변천

만주 지역에서의 시천교 활동은 1907년 일제가 용정에 통감부 임시 파출소를 설립하는 시점에 맞추어 시작되었다. 시천교는 당시 간도 지부장 윤갑병(尹甲炳)을 중심으로 일제의 세력을 등에 업고 친일 사상을 고취하면서 교세를 급속히 확장하였다. 윤갑병의 후임으로 파견된 이희덕(李熙德)은 『동경 대전(東經大全)』, 『시천교 종(侍天敎宗)』, 『시천교 종지(侍天敎宗旨)』 등의 서적을 이용하여 전도 활동을 전개하여 1908년 10월 용정에 시천교 교당(敎堂)을 설립하였다.

시천교는 일제와의 밀접한 관계를 이용하여 연변에 있는 일본 영사관, 영사분관 및 파출소 소재지에 시천교 분회와 교당을 설립하였으며 13개소에 달하는 사립 학교를 운영하면서 교육 분야에서의 친일 활동을 진행하였다. 이 당시 시천교의 교세는 절정에 달하여 1만여 명에 달하는 신도를 확보하였다.

1909년 간도 협약 이후 통감부 간도 파출소와 헌병 파견소들이 연이어 철거되었고, 중국 당국의 친일 단체에 대한 제한 조치가 강화되는 한편으로 만주 지역에서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친일 성향을 보이던 시천교만주 내 교세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1911년 5월 용정 교당에 화재가 발생한 이후 시천교는 더욱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1915년에는 신도수가 1,300명으로 감소하였으며, 1917년에는 교당 수 33개, 신도 수 342명으로 더욱 세력이 약화되었다.

1920년 일제의 세력을 빌려 교세 확장을 시도하고 1922년 동정(東征) 학교를, 1924년 6월에 동아 학교를 각각 설립하였으나 친일 종교였기에 교세 확장은 지지부진하였다.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만주국 정권과 일제의 도움으로 일시 교세가 확장되는 기미를 보였으나 친일 성향이 지역 한인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여 큰 확장은 이루지 못하였다. 1934년 교당 7개, 신도 796명, 1936년 6월 만주에 9개 교당, 신도 891명이었으며 전부 간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에는 만주 지역에서 완전히 소멸하였다.

만주 이주 계획

이용구는 시천교의 세력이 확장된 만주에 한일 합방 이후 한반도 내 시천교 신도를 포함한 100만 명의 일진회 회원을 이주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는 당초 이에 대한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으나, 한일 합방 이후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일진회를 배신하고 ‘집회 결사 엄금령’에 의거하여 형식상의 유예 기간을 둔 자진 해산 형식을 통해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어진 일진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 때 일진회는 해산비로 15만 원을 받았을 뿐으로, 이는 처음 일제가 약속한 자금 지원 액수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양이었기 때문에 만주 이주 계획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의의 및 영향

일제는 친일 성향인 시천교를 우호 세력으로 간주하였기에 시천교는 일제를 배경으로 초기에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일 감정이 고조되고 일제의 지원이 약해지자 급속히 세력이 축소되었고 이를 다시 재건하지 못하였다. 이는 당시 만주 지역의 반일 감정을 나타내는 동시에 시천교가 어디까지나 자체적 철학 체계가 부족했던 단순한 관변 종교에 불과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한국학중앙연구원 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 주성화, 『중국 조선인 이주사』(한국학술정보, 2007)
  • 김춘선, 『중국조선족통사 下』(연변인민출판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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