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崔振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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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 崔振东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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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대표경력 | 군무 도독부 부장 |
출생 시기/일시 | 1878년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몰년 시기/일시 | 1945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0년 |
출생지 | 함북 온성 |
거주|이주지 | 중국 왕청현 |
학교|수학지 | 중국 왕청현 |
활동지 | 만주, 연해주 |
1920년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무장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최진동은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 왕청현 대전자에서 중국 순경 국장(巡警局長)으로 근무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최진동과 그의 형제들은 조국 광복의 염원을 달성하기 위하여 왕청현 춘화향 봉의동에 군무 도독부(軍務都督府)를 설치하고 무장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최진동은 도독으로 이호(李虎)를 추대하고 자신은 재정부장을 맡아 활약하였다. 그 뒤 최진동은 부장으로서 도독부를 지휘하여 함북 온성 일대의 일본 식민 통치 기관을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군무 도독부군은 3백여 명이었다. 최진동은 사령관이었고, 부관에는 안무(安武), 연대장에는 홍범도(洪範圖)가 각각 임명되었다. 이 부대는 종성·온성·무산 등지를 8차례나 습격하여 일제 헌병대를 파괴하였다.
1920년 1월 최진동은 광복단 단장과 고문으로서 활동했다. 1920년 6월에는 대한 독립군을 지휘하여 봉오동에서 일본군 맞아 전투를 벌여 12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1920년 10월 최진동은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와 연합하여 청산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였다.
1920년 11월 청산리 전쟁 후, 최진동은 동녕현 삼차구에서 북로 군정서·대한 독립군·국민회·신민회·의군부·혈성단·야단·대한 정의 군정사를 통합한 대한 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편성하여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계획했다. 그는 일본군의 ‘간도 출병’에 따라 자유시로 이동하여 고려 혁명 군관 학교를 세워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대한 총군부(大韓總軍府) 외교부장으로 활동하였으나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단은 와해되고 말았다.
1922년 11월 최진동은 김규면(金圭冕)과 함께 부대를 인솔하고 우리나라 국경 방면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1923년 김응천(金應天)·김규식(金奎植) 등과 북간도로 돌아와 독립 전선의 통일을 꾀하였다. 1924년 1월에는 동 독립군단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최진동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