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초구 유적

한자 百草溝 遺蹟
중문 百草沟遗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백초구진 안전촌  
시대 선사/청동기|선사/철기
상세정보
성격 유적
크기 1.5㎞[길이]|1㎞[너비]
문물|보호단위등급 성급 문물 보호 단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53년 가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58년 5월
문화재 지정 일시 1961년 4월 13일
현 소재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백초구진 안전촌
원소재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백초구진 안전촌
정의

길림성(吉林省) 연변조선족자치주(延边朝鲜族自治州) 왕청현(汪淸縣) 백초구진(百草溝鎭) 안전촌(安田村)에 있는 청동기 및 철기 시대의 유적.

위치

백초구 유적은 왕청현성(汪淸縣城) 서남 15㎞를 가면 만날 수 있는 백초구 평원 중부의 안전촌 동쪽, 알아하(嘎呀河) 우안의 대지에 위치한 선사 시대 마을 유적지이다. 유적지 서북 1㎞, 신화려촌(新華閭村) 뒤의 북산(北山) 산비탈 위에 유적과 동일한 시기의 고분이 하나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백초구 유적은 1952년 백초구 중학교의 한 학생이 신화려에서 많은 석기를 채집하였는데, 이로인해 길림성 문화국에서 파견한 사람들이 가서 조사하면서 유적과 고분을 발견한 것이다. 1953년 길림성 박물관이 사람을 파견해 이곳에서 발굴을 진행하였다.

발굴 지점은 논의 배수구 남북 양측과 배수구 북쪽 약 60m 지점 일찍이 대형 항아리[陶缸]가 발견된 곳에 있다. 발굴은 모두 3개 구역으로 나누어 이루어졌는데 배수구 북쪽은 제1구역으로 면적이 3×8㎡이며, 남쪽은 제2구역으로 면적이 1.5×1.5㎡이며, 항아리가 출토된 곳이 제3구역으로 면적이 5.5×3.5㎡이다. 제2구역을 제외하면 퇴적이 모두 상·하 두 개의 문화층으로 나뉜다.

제1구역 제2문화층[상층]에서는 부엌 기초[竈基]가 하나 발견되었는데 4개의 화강암석으로 조성되었으며 그 가운데 3개는 삼각형 배열이고 다른 하나는 약간 멀리 있다. 돌[石塊] 바닥 아래에는 황색점토가 있으며, 아직 불에 타서 단단한 소토(燒土)는 발견하지 못했다. 부엌 안팎에는 목탄 및 토기 잔편 등이 남아 있다.

제1구역 제1문화층[하층]에서는 집자리 잔흔이 한 곳 발견되었다. 거주면(居住面)은 협사흑회(夾砂黑灰)를 문질러 평평하게 하였으며, 두께가 약 10㎝이며, 표면 1㎝는 흑회색을 띠고 비교적 단단하다. 발굴 면적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 범위는 확실하지 않다.

제2구역에는 제2문화층만 있다. 아직 부엌 기초석[竈基石]과 주춧돌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두께는 30㎝에 달하는 홍소토(紅燒土)이며, 토기 잔편들이 섞여 있다.

제3구역 제2문화층에서는 주춧돌 8개가 발견되었는데 남북 길이 4.5m, 동서 너비 1.5∼2m의 범위 내에 배열되었다. 기초석은 풍화된 화강암인데 길이 및 너비가 약 20㎝이며, 어떤 것은 2·3개의 작은 돌을 모았고 어떤 것은 2·3개의 돌을 중첩하였으며, 평면이 위로 향하며 기초석 간의 거리는 서로 약 0.5m이다. 전부 기초석이 거주면 위에 놓여 있으며, 거주면은 완만한 경사면을 띠고 있는데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표면은 비교적 단단하다.

제3구 제1문화층에서 발견된 거주면에는 제2문화층 거주면의 견실함이 없다. 서부에서는 화강암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가로로 평평하게 놓여 있으나 기초석 여부를 아직 확정하기 어렵다.

출토 유물

백초구 유적의 출토 유물은 매우 풍부한데, 주로 토기·석기·골각기·청동기·장식품 등이 있다. 토기는 적갈색이 다수를 차지하고 흑갈색이 적으며, 소성도는 고르지 않으며, 아직 윤제(輪製) 또는 모제(模製)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소형 기물은 모두 수제(手製)이며, 대형 기물은 진흙 반축[盤築]이며, 외부는 문질러 평평하며, 광택은 매우 적으며, 모두 무문(無文) 토기이다. 어떤 것은 바닥[器底]에서 니배(泥坯)를 말릴 때 받쳤던 상수리 나뭇잎 흔적이 발견된다.

석기 수량은 매우 많다. 두 문화층의 석기는 명확한 차이가 없다. 기형은 석부(石斧)·석분(石錛)·석도(石刀)·석착(石鑿)·석모(石矛)·석촉(石鏃)·간돌[磨石]·갈판[磨盤]·갈돌[磨棒] 등이 있다. 석부는 주로 대형 기둥 모양 석부이며, 횡단면은 타원형이며, 검신을 갈고 칼날을 문질렀으며, 호인(弧刃)·사인(斜刃)·평인(平刃) 등 몇 종류가 있다. 그 외 일종은 판상(板狀) 석부로 횡단면이 평평한 타원형이며, 다수가 일면인(一面刃)이다.

석분은 일반적으로 일면인(一面刃)이며, 기신(器身)은 석부와 거의 큰 구별이 없으며, 기형이 비교적 작다. 석도는 일반적으로 배 위에 구멍이 하나 또는 두 개가 뚫려 있으며, 인부(刃部)에는 일면인(一面刃) 또는 양면인(兩面刃)이 있다. 자주 보이는 것은 보통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장방형 직인(直刃)이며, 다른 하나는 호배요인(弧背凹刃)이다.

석모의 형상은 둥근 혀모양[圓舌狀]과 삼각모양 등 두 종류가 있으며, 인부(刃部)는 다수가 양면인(兩面刃)이고 손잡이 부분(柄部)는 타제 흔적이 있다. 석촉은 추형(錐形)·유엽협(柳葉形)·도엽형(桃葉形) 등이 있으며, 마제로 세밀하며 일반적으로 모두 척(脊)이 있다. 갈판[磨盤]·갈돌[磨棒]이 비교적 많이 발견되었다. 갈판의 평면은 넓고 길어 정방형에 가까우며, 연마(硏磨)로 인해 중간이 오목하다. 갈돌은 평면이 좁고 긴 봉모양[棒狀]으로 연마로 인해 중간이 오목하다. 이밖에 많은 석재와 반제품이 발견되었다.

골각기는 모두 제1문화층에서 출토되었다. 기형은 비수(匕首)·모두(矛頭)·추(錐)·침(針)·인기(刃器)와 복골(卜骨) 등이 있다. 골각기는 다수가 짐승뼈[獸骨]를 가공하였는데 어떤 것은 녹각(鹿角)으로, 복골은 양의 견갑골로 만들었다.

단애 위의 문화층과 해안에서 녹송석관(綠松石管)·마노구슬[瑪瑙珠]·흑석구슬[黑石珠] 등의 장식품을 채집하였다. 제1구역 제1문화층의 부엌터[竈址] 서측에서 길이 2.5㎝, 너비 1㎝의 청동 찌꺼기[渣]가 발견되었다.

의의와 평가

백초구 유적의 상·하 두 개 문화층은 동일 문화의 두 개의 다른 발전 단계이다. 제1문화층에서 청동 찌꺼기[渣]가 발견되었고 유적지와 동일 시기의 신화려 고분군에서는 철기가 발견되었다. 이 유적지는 이미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진입하였으며, 시기는 전국(戰國)에서 양한(兩漢)에 해당한다.

두 문화층에서 모두 거주면 및 대량 석부·석도·갈판·갈돌 등의 농업 생산 도구가 있던 것은 당시 이곳의 거주민이 정착 생활을 했고, 농업 생산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고, 어로 및 수렵은 생활 속에서 보조 작용만을 했던 사실을 보여준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및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 등의 기록과 최근의 고고 조사와 연구에 근거하면, 현재 길림성의 연변 지구[돈화(敦化) 제외]와 흑룡강성 동남 일부분은 러시아연해주 일부분을 포괄하여 고대 예맥족계(濊貊族系)인 북옥저인(北沃沮人)의 거주지이다.

백초구 유적지는 동쪽으로 알아하(嘎呀河) 하안에서 일어나고 서쪽으로 원래 안전촌[옛 명칭, 신안려(新安閭)]에 이르는데 동서 약 1.5㎞이고 남북 약 1㎞이다. 유적지 면적이 크고 문화층의 퇴적이 두텁고 문화 유물이 풍부한 것이 길림성 원시 촌락 유적지 가운데서 많이 볼 수 없다.

참고문헌
  • 『汪淸縣 文物志』(吉林省 文物志 編委會 主編, 1983)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中國地圖出版社, 1993)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