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루총

한자 牟頭婁塚
중문 牟头娄冢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 하해방촌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문물|보호단위등급 중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조성 시기/일시 5세기 중반경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4세기 말경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5세기 중반경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35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35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57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5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7년
보수|복원 시기/일시 1963년
보수|복원 시기/일시 1978년 6월
보수|복원 시기/일시 1994년
문물 지정 일시 1961년 3월 4일
소재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하해방촌
정의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태왕진(太王鎭) 하해방촌(下解放村)에 있는 고구려장수왕(長壽王)대 모두루 부부의 무덤.

개설

모두루총집안시통구 고분군(通溝古墳群)의 6개 권역 중 하나인 하해방 고분군(下解放古墳群) 내에 있다. 돌방 흙무덤[봉토 석실분(封土石室墳)]이며, 무덤 안에 벽화를 그린 것은 아니지만 800여 자에 달하는 묵서(墨書) 명문(銘文)이 있어 흔히 벽화 고분으로 분류한다. 묵서 명문의 주인공을 염모(冉牟)로 보아 염모묘(冉牟墓)로 부르기도 하는데, 1966년 중국 정부에서 하해방 1호분으로 편호하였다.

위치

모두루총은 길림성 집안시의 통구 고분군 가운데 하해방 고분군에 위치해 있다. 하해방은 집안 분지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비옥한 들판으로, 유유히 포물선을 그리며 흐르는 압록강에 둘러싸여 있다. 모두루총은 이 들판 한복판에 하해방 2호분과 함께 위치해 있지만, 환문총(環文塚)을 비롯한 다른 고분은 대부분 들판 북쪽의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모두루총은 1935년 9월, 집안현 중학교 교사였던 왕영린(王永璘)에 의해 처음 알려졌고, 1935년에 일본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등이 고분의 전체 현황을 조사하고 묵서 명문을 판독해 ‘모두루 묘(牟頭婁墓)’라고 명명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중국 학자들이 여러 차례 조사하였다. 1957년 길림성 박물관에서 전체 현황을 조사하였고, 1963년 집안현 문관소에서 봉분과 무덤문을 수리하였다. 1965년 길림성 문물보관회·길림성 박물관 등에서 실측을 하였다. 1997년 길림성 문물 고고 연구소·집안시 박물관에서 다시 실측 조사를 실시하였다. 한편 1978년에는 중국 정부가 명문을 보존하기 위한 과학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6월 집안현 문관소에서 명문을 화약 안료로 처리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1994년에도 보수 공사를 실시하였다.

형태

모두루총은 돌로 널방을 꾸미고 흙으로 봉분을 입힌 돌방 흙무덤으로 둘레 70m, 높이 4m로 중형 규모이다. 현재 둥그스름한 외형을 띠고 있지만, 본래는 위쪽이 평평하고 네모진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으로 방향은 서남향이다. 높이 1.1m인 나지막한 널길을 따라 1.3m 정도 들어가면 무덤방 두 개가 나온다. 두 방 사이에 통로만 있을 뿐 다른 공간은 없다. 감실이나 측실이 딸리지 않은 가장 단순한 두 칸 무덤이다. 앞방은 좌우 2.9m, 앞뒤 2.1m로 좌우가 약간 긴 직사각형인 반면, 널방은 한 변이 3m로 정사각형에 가깝다. 벽면은 돌을 쌓은 다음 백회를 두껍게 입히고 매끈하게 미장하여 정갈한 느낌을 주지만, 벽화를 그리지 않았다. 앞방의 천장이 아치형으로 좁아지다가 꼭대기가 자그마한 직사각형으로 변하는 반면, 널방 천장은 사각 고임과 삼각 고임으로 공간을 알맞은 비례로 분할하며 줄여 나갔다. 널방 바닥에는 주인공 부부의 시신을 안치한 관대 2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이러한 무덤 구조는 다실묘에서 단실묘로, 복잡한 두 칸 무덤에서 단순한 두 칸 무덤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준다.

모두루총에서 나온 묵서 명문은 앞방의 정면 상단에 두루마리처럼 기다랗게 펼쳐져 있다. 오른쪽 모서리에서 36㎝ 떨어진 지점에서 시작하여 왼쪽 모서리를 돌아 10㎝ 정도 이어지다가 끝맺는다. 첫머리 2행은 다른 행과 달리 괘선이 없고, 글자 간격도 좁아 12자씩 적었다. 그 다음부터 79행이 이어지는데, 먹과 송곳으로 3㎝ 전후의 괘선을 네모 반듯하게 긋고 행마다 10자씩 써 내려갔다. 묘지 내용은 모두루와 그 조상의 내력을 각 왕의 사적과 함께 시간순으로 적었다. 제기(題記) 다음의 3∼9행에는 고구려 건국 설화와 더불어 모두루의 조상이 시조인 추모성왕(鄒牟聖王)을 따라 북부여로부터 내려온 사실이 적혀 있는데, 특히 ‘천하 사방이 이 나라의 ○가 가장 성스러움을 알고 있을지니’라는 표현은 고구려의 천하관을 잘 보여준다. 10∼39행에는 대형(大兄) 염모고국원왕(故國原王)대에 모종의 반란 사건을 진압하고, 북부여로 침입한 전연(前燕)을 물리치는 공훈을 세운 사실이 적혀 있다. 대형 염모는 대내외적으로 혁혁한 공훈을 세운 모두루가의 중시조인 것이다. 40∼45행에는 대형 염모의 공훈에 힘입어 모두루의 선대가 북부여 방면 교통로 주변의 성민(城民)과 곡민(谷民)을 다스린 사실이 적혀 있다. 그리고 45행 이후에는 모두루가 선대의 공훈에 힘입어 ‘영북부여수사(令北扶餘守事)’로 임명되어 북부여에 파견되었다가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사망을 접하고 통곡한 사실이 적혀 있다. 후반부에는 장년 내지는 노년의 모두루가 장수왕대에 활동한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명문을 거의 판독할 수 없는 상태이다.

현황

1961년 3월 4일 중국 국가 문물국으로부터 중국 전국 중점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 받았다.

의의와 평가

모두루총의 묵서 명문이 널방 앞에 위치해 묘지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주인공에 대해서는 모두루설과 염모설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노간(勞幹) 이래 중국 학자들은 묵서의 ‘노객(奴客)’이라는 표현을 ‘예속인’으로 풀이해 염모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모두루는 그의 가신으로 파악했다. 그렇지만 관등과 인명[대사자(大使者) 모두루(牟頭婁)]만 나오는 첫머리 2행이 제기(題記)임을 상기하면, 모두루가 주인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염모모두루의 할아버지로서 모두루 집안의 중시조에 해당하며, ‘노객’은 성스러운 고구려 왕실과 모두루 가문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비칭(卑稱)이다. 모두루는 장수왕대에 사망했을 것이므로 이 무덤은 5세기 중반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묘지는 총 800여 자 가운데 350여 자밖에 판독되지 않지만 고구려의 천하관을 비롯하여 건국 설화, 대외 관계, 관등제, 지방제도, 왕실과 귀족 가문의 관계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 池內宏, 『通溝』下(1940)
  • 勞幹, 「跋高句麗大兄冉牟墓誌兼論高句麗都城之位置」(『歷史言語硏究所集刊』11, 1944)
  • 박시형, 『광개토왕릉비』(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 佐伯有淸, 「高句麗牟頭婁墓誌の再檢討」(『史朋』7, 1977)
  • 田中俊明, 「高句麗の金石文」(『朝鮮史硏究會論文集』18, 1981)
  • 武田幸男, 「牟頭婁一族と高句麗王權」(『조선학보』99·100, , 1981)
  • 허흥식, 『한국금석전문』고대편(1984)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1984)
  • 노태돈, 「모두루묘지」(『역주한국고대금석문』1 , 1992)
  • 孙仁杰·迟勇, 『集安高句麗墓葬』(香港亞洲出版社, 2007)
  • 吉林省集安市文物局, 『高句麗王城王陵及貴族墓葬』(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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