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회분 4호 고분

한자 五盔墳 4號 古墳
중문 五盔坟4号墓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 과수촌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고구려 시기 고분
양식 흙무지 돌방 벽화 무덤(봉토석실벽화분)
크기(높이 10m
지름) (밑면 한 변의 길이) 30m×30m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45년 이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50년 겨울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2년 6월∼8월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4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5년 6월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6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7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4년∼2005년
보수|복원 시기/일시 1974년 3월
보수|복원 시기/일시 1974년 9월
보수|복원 시기/일시 1974년 10월
문화재 지정 일시 2004년 7월
소재지 집안시 통구 고분군 내 우산하 고분군북위 41°08′224″,동경 126°11′855″
정의

길림성(吉林省) 통화시(通化市) 집안시(集安市)통구 고분군(通溝古墳群) 산하 우산하 고분군(禹山下古墳群)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무덤.

위치

오회분 4호 고분집안시우산하 고분군의 중심부 남쪽 끝에 위치한다. 중심 지리 좌표는 북위 41°08′224″, 동경 126°11′855″이며, 묘 정상부의 해발 고도는 225m이다. 오회분 4호 고분은 오회분의 다섯 고분 중 서쪽에서 네 번째 자리하고 있어서 오회분 4호 고분이라 불린다. 동쪽으로 40m가 안 되는 거리에 오회분 5호 고분이 있다. 서쪽으로는 오회분 3호 고분이 5m 거리에 있다. 남쪽 50m 지점에는 집안-과수장(果樹場) 간 도로가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오회분 4호 고분은 1909년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조사되었다. 당시에는 서강 61호분(西崗 61號墳), 통구 미편호분(通溝未編號墳)으로 불렸다. 1950년 겨울, 인민해방군 부대장에 의해 무덤문이 열려 임의로 사용되다가 국가 문화부의 개입으로 무덤문이 폐쇄되었다. 이때 고분 안의 벽화가 주목을 받았다. 1962년 6월에서 8월 사이 집안현 문물보관소와 길림성 박물관이 정식으로 조사, 발굴하였다. 1964년, 발굴 보고서가 출간되면서 오회분 4호 고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65년 6월에 길림성 박물관이 고분의 실측, 내부 벽화의 모사 작업을 진행하였다. 1966년, 통구 고분군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오회분 4호 고분에도 통구 고묘군 우산 묘구 제2104호 고분[JYM2104]이라는 편호가 부여되었다.

1974년 3월, 집안현 문물관리소와 길림성 박물관이 벽화의 수리를 검토하였고, 같은 해 9월, 벽화 수리, 화학적 보존 처리가 진행되었다. 아울러 10월에는 무덤의 수리가 이루어졌다. 이때 무덤 안에서 금동 단추 2점, 금동 못 1점, 금동 꽃무늬 장식품 1점, 도금 박편 2점, 쇠못 3점, 칠기 관목 잔편 등이 수습되었다.

1997년 통구 고분군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와 실측 과정에서 오회분에 대한 조사와 재실측도 이루어졌다. 2004년 7월에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2004∼2005년에는 장복유(張福有)·손인걸(孫仁杰)·지용(遲勇) 등이 여러 차례 조사와 실측을 진행하였다. 조사 과정에서 묘 표면에 흩어져 있는 기와 잔편 다수가 수습되었다.

형태

오회분 4호 고분은 밑면이 방형인 상태에서 올라가다가 맨 윗부분이 잘린 듯 처리된, 이른바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의 외형을 하고 있다. 봉분의 크기는 밑면 한 변의 길이가 각 30m, 높이가 10m[『통구 고묘군(洞泃古墓群)』], 또는 분묘 둘레 160m, 높이 8m[『집안 고구려 묘장(集安高句麗墓葬)』]라고도 한다.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무덤의 내부는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 구조이며, 방향은 동으로 30° 기운 남향이다. 널길이 널방의 가운데가 아닌 동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널방으로 가면서 점차 좁아진다. 바닥에는 원토를 평평하게 다지고, 그 위에 돌을 깐 후 회칠을 하였다. 널길의 벽은 큰 돌로 축조하였으며 그 겉면에 역시 석회를 발랐다. 천정에는 큰 돌이 세 겹으로 덮여 있으며 그 높이는 1m가량이 된다. 널길의 길이는 6m, 널길이 시작되는 곳의 너비는 3.5m, 안길이 끝나는 지점의 너비는 1.6m이다. 널길은 높이는 1.9m이다. 널길의 좌우 벽에는 문지기가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그 형태가 분명하지 않다.

널방 입구에는 돌로 만든 문틀이 있다. 길이는 1.55m, 너비는 0.2m, 높이는 1.9m이다. 널방은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널방의 벽은 화강암을 잘라 들여쌓기로 쌓아 올렸고 틈새는 회로 채웠다. 널방의 크기는 동서 4.2m, 남북 3.68m, 높이 3.64m이다. 널방에는 남북으로 세 개의 관대가 놓여 있다. 관대의 북쪽 끝은 북쪽 벽과 닿아 있다. 세 관대의 크기는 대략 길이 2.45∼2.71m, 너비 1.05∼1.25m, 높이 0.16m 정도이다.

벽화는 벽 위에 직접 그렸으며 널방의 벽화가 잘 남아 있다. 벽화의 기본 주제는 사신으로 널방의 네 벽에는 연꽃무늬 바탕에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가 그려져 있다. 동벽의 청룡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머리를 들고 입을 벌린 상태로 달리고 있으며 이마 부분에 인동무늬[忍冬文] 장식이 있다. 뿔은 황색, 머리는 녹색이며 잔등에는 녹색, 홍색, 갈색, 황색을 사용하였다. 목 부분은 홍색과 황색으로 칠했다.

서벽의 백호는 동벽의 청룡처럼 남쪽을 향해 달리고 있다. 검은 선으로 백호의 윤곽을 잡고 몸통은 흰색으로 처리하였다. 몸에는 불꽃무늬가 있으며 발은 용과 같이 세 발가락으로 되어 있다.

남벽의 주작은 꼬리를 길게 하고 날개를 편 상태에서 연꽃을 딛고 서있는 형상이다. 몸통은 홍색이며 부리는 황색, 벼슬은 홍색이다. 꼬리에는 녹색의 점이 있으며 사선 방향으로 뻗어 있다. 이 주작은 몸통이 가늘고 길어 다른 주작의 모습과 약간 다르다.

북벽의 현무는 거북이와 뱀이 얽힌 모습이며, 고구려 벽화의 현무도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게 얽힌 형태이다. 거북은 머리는 들고 입을 벌려 혀를 드러내고 있다. 몸통은 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잔등에 육각형 무늬가 있다. 뱀은 두 가지 색으로 되어 있는데, 배 부분은 갈색, 등은 황색으로 되어 있다.

사신도의 바탕에는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으며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특히 그물무늬 아랫부분에 연꽃잎이 있는 도안의 경우 연꽃 위에 인물상을 그려 놓았다. 모두 10인 정도로 파악되는 이들 인물은 복식이나 동작이 각기 다르다.

우선 동벽의 인물은 머리에 농관(籠冠)을 쓰고 포(袍)를 입었으며 검은 신발을 신고 있다. 몸을 앞으로 구부린 채 손에는 부채를 쥐고 있다. 북벽에는 모두 4명의 인물상이 있다. 상단 가운데의 인물은 농관을 쓰고 녹색 깃이 달린 포를 입었다. 검은 신발을 신고 손에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이 동벽의 인물과 흡사하다.

북벽 상단 끝부분의 인물 역시 앞서 언급한 이들과 차림새는 비슷하다. 농관에 포, 검은 신발을 신었으며 포 위에는 붉은 폐슬(蔽膝)을 하고 있다. 이 인물은 왼손에 둥근 부채를 들고 있으며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여주고 있다. 북벽의 왼쪽 아랫 부분에는 한 인물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는 승려와 같이 짧은 머리를 하고 있으며 녹색 바탕에 붉은 깃이 달린 포를 입고 있다. 연꽃 위에 앉아서 한 손에는 긴 막대를 들고 팔괘도(八卦圖)를 보고 있다. 이 태극의 팔괘는 고분 벽화 축조 당시 그려진 것인지 후대에 그려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북벽 오른쪽 하단의 인물 역시 농관을 쓰고 홍색과 황색이 섞인 포를 입고 있다. 신발은 확실치 않으나 다른 인물과 같이 검은 신발을 신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손에는 골프채와 비슷하게 생긴 물건을 쥐고 있는데, 위진 남북조 시기 유행하던 주미(麈尾)일 가능성도 있다.

서벽에는 모두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상단 가운데에 있는 인물은 농관을 쓰고 녹색 도포를 입었으며 검은 신발을 신고 있다. 오른손에는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둥근 부채를 들고 있다. 서벽 상단의 오른쪽 인물은 연한 갈색 포를 입고 연꽃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왼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에는 책을 들고 있다. 서벽 하단에는 농관을 쓰고 포를 입고 검은 신발을 쓴 인물이 한 명 더 그려져 있다.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있으며 한 손은 등 뒤에 두었다.

남벽에서는 두 명을 확인할 수 있다. 상단에 보이는 인물은 머리를 높게 올리고 황색 깃이 달린 연한 갈색 포를 입고 있다. 오른팔은 굽히고 왼팔은 등 뒤로 하였다. 또 한 명의 인물은 주작의 날개 아래에 있다. 역시 머리를 높이 올리고 흰색의 날개옷을 입었다. 오른쪽 다리를 구부리고 왼손으로 무엇인가는 집으려는 자세를 하고 있다. 널방의 네 기둥에는 들보를 받치고 있는 괴수가 그려져 있다. 괴수는 근육이 선명한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으며 용의 뿔을 가진 얼굴이다. 날개옷에 발은 맨발이다.

널방의 네 벽 위에 평행 고임을 하였고 그 위에 2단의 삼각 고임을 올려 천정을 만들었다. 평행 고임을 위한 석재는 벽보다 12㎝ 튀어나와 있으며 높이는 56㎝이다. 1단의 삼각 고임은 아래서 보면 마름모꼴이며 높이는 56㎝이다. 2단의 삼각 고임은 평행 고임과 평행을 이루고 있으므로 아래서 보면 방형이 된다. 2단 삼각 고임의 높이는 60㎝이다. 2단의 삼각 고임 위에 가공한 큰 판돌을 얹어 천정을 완성하였다.

평행 고임의 네 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꼬리를 물고 있는 교룡도안이 그려져 있다. 교룡도안 이외의 공간에는 마름모꼴 무늬가 그려져 있다. 삼각 고임에도 벽화가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해신과 달신을 비롯하여 소의 머리를 한 농사의 신, 수레바퀴를 만드는 신, 음악을 연주하는 선인(仙人) 등이 등장한다. 해의 신은 남자, 달의 신은 여자로 각각 해와 달은 머리 위로 들고 있다. 농사의 신은 소의 머리를 한 사람의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비천상은 황색 날개옷을 입고 날아가는 자세를 하고 있다. 2단 고임에서는 여러 선인(仙人)들을 볼 수 있다. 이곳에 그려진 선인들은 거문고나 요고(腰鼓) 같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릇을 들고 날아가기도 한다. 용을 타고 피리를 불기도 하고 공작새를 타고 가기도 한다. 학을 탄 선인, 뿔 나팔을 부는 선인 등도 확인할 수 있다. 1, 2단 삼각 고임의 아랫부분에는 용이 한 마리씩 있으며 천정의 개석에는 황룡이 그려져 있다.

출토 유물

오회분 4호 고분은 일찍이 도굴을 당하여 유물이 많지 않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유물로는 금동 단추 2점, 금동 못 1점, 금동 꽃무늬 장식품 1점, 도금 박편 2점, 쇠못 3점, 옻칠을 한 관목(棺木) 잔편 등이 있다. 금동 단추 2점은 평면 생김새가 원형이며 가운데가 불룩하게 나와 있다. 테두리에는 4개의 구멍이 대칭으로 나 있다. 금동 장식품 1점은 6개의 잎이 있는 꽃모양 장식품이다. 앞면의 가운데가 불룩 솟아 있고 둘레에는 대칭적인 6개의 구멍이 있다. 뒷면은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있다. 쇠못은 네모난 머리에 끝이 뾰족하고 원형인 못대가 붙어 있는 형태이다. 길이는 12.5㎝∼16㎝이다.

현황

2004년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의의와 평가

오회분은 연이어 있는 5개의 고분 모양이 투구[盔]와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회분 4호 고분의 벽화는 그 내용과 표현이 오회분 5호 고분과 유사하다. 그러나 오회분 5호 고분의 벽화에 비해 세련되고 널방의 천정 고임이 안정감이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오회분 4호 고분오회분 5호 고분과 거의 비슷한 시기이면서도 그보다는 조금 늦는 6세기 후반 즈음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손인걸·지용은 오회분 4호 고분고구려의 왕이 집안 지역으로 귀장(歸葬)해 조성한 왕릉으로 보고 있다. 더 나아가 장복유는 오회분 4호 고분을 영류왕릉(榮留王陵)에 비정하고 있다. 고구려에 귀장 풍습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많다. 오회분 4호 고분을 비롯한 오회분의 고분이 대규모 고분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들 고분을 왕릉으로 비정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근거가 필요하다. 특히 오회분 4호 고분이 평양 천도 이후에 재위한 왕의 귀장묘라는 견해는 현재로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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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과학원 고고학 연구소, 『고구려 벽화무덤』2(진인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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