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회분 3호 고분

한자 五盔墳 3號 古墳
중문 五盔坟3号墓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 과수촌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고분
양식 기단식 흙무지 돌방 무덤(기단 봉토 석실분)
크기(높이 15m
지름) (한 변의 길이) 각 35m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09∼1910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35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6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4년∼2005년
보수|복원 시기/일시 1962년 봄
보수|복원 시기/일시 1998년
문화재 지정 일시 2004년 7월
소재지 집안시 태왕향 과수촌우산하 고분군북위41°08′207″,동경126°11′826″
정의

길림성(吉林省) 통화시(通化市) 집안시(集安市)통구 고분군(通溝古墳群) 산하 우산하 고분군(禹山下古墳群)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무덤.

위치

오회분 3호 고분집안시우산하 고분군의 중심부 남단에 위치한다. 동서로 늘어서 있는 오회분의 다섯개 고분 중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오회분 3호 고분이라 부른다. 중심 지리 좌표는 북위 41°08′207″, 동경 126°11′826″이며, 고분 정상의 해발 고도는 226m이다. 서쪽으로 130m 지점에는 오회분 2호 고분이 있으며, 동쪽으로 약 5m 가면 오회분 4호 고분이 있다. 북쪽으로 약 30m 지점에는 사신총(四神塚)[JYM2110호묘]이 위치한다. 남쪽으로 50m정도 가면 집안-과수장(果樹場) 간 도로가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09∼1910년 야쓰이 사이이치[谷井濟一], 구리야마 슌이치[栗山俊一]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 학자들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1935년에는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구로다 겐지[黑田源次], 미카미 쓰구오[三上次男],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등이 집안의 도성, 중요 고분을 조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오회분 3호 고분에 대한 조사 역시 이루어졌다.

1962년 봄 길림성 박물관, 집안현 문물보관소에서 조사를 진행하고, ‘오회분 3호묘’라 명명하였다. 같은 해 봉분을 보수하였다. 1966년에는 통구 고분군에 대한 조사와 실측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통구 고묘군(洞泃古墓群) 우산 묘구(禹山墓區) 2103호묘[JYM2103]라는 편호를 갖게 되었다. 이후 수년 간 여러 차례에 걸쳐 조사가 진행되었다. 1998년에는 고분 주변 담장을 수리하였고, 2004∼2005년에 걸쳐 장복유(張福有)·손인걸(孫仁杰)·지용(遲勇) 등이 여러 차례 조사와 실측을 진행하였다.

형태

오회분 3호 고분은 기단이 있는 기단식 흙무지 돌방무덤으로 현재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분구는 밑면이 방형인 상태에서 올라가다가 맨 윗부분이 잘린 듯 처리된, 이른바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이다.

고분의 규모는 밑면 한 변의 길이가 각 35m이고 높이가 15m(『통구 고묘군』), 혹은 둘레 130m, 높이 9m(『集安高句麗墓葬』)라고도 한다. 아직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고분의 내부 구조는 알 수 없다.

오회분 3호 고분은 서쪽과 남쪽, 그리고 북쪽 세 면에 기단이 만들어져 있으며 동쪽 기단은 오회분 4호 고분의 기단과 연결되어 있다. 기단에는 가공된 화강암이 쓰였으며 일반적인 길이는 0.8m 정도이며 너비는 0.5m, 높이 0.4m이다.

출토 유물

오회분 3호 고분 자체의 출토 유물은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2004∼2005년 장복유·손인걸·지용 등이 고분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고분 주변에서 수습한 기와편이 전해진다. 암키와, 수키와 잔편이며 색깔은 대부분 회색이다. 기와의 바깥쪽에는 손으로 누른 자국[수말(手抹)]이 있으며 안쪽에는 베무늬[포문(布紋)]가 시문되어 있다.

현황

2004년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의의와 평가

오회분은 연이어 있는 5개의 고분 모양이 투구[盔]와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회분 3호 고분과 4호 고분은 기단이 서로 연접하고 있다. 이는 두 고분의 피장자가 혈연 관계이거나 같은 서열[혹은 항렬]에 속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우산하 2113호 고분[사신총]은 오회분 3호 고분과 4호 고분의 북쪽에 있는데, 이는 사신총이 이들 고분보다 서열 혹은 항렬이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고분의 조합은 고구려 왕릉의 매장 제도를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미 발굴된 오회분 4호 고분[JYM2104]의 경우 묘실 내부를 화려한 벽화로 장식하고 있으므로 4호분과 관련이 깊은 3호분에도 벽화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장복유는 오회분 3호 고분을 영양왕릉(嬰陽王陵)에 비정하고 있으나 『고구려 왕릉 통감(高句麗王陵統鑒)』에서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아마도 오회분 4호 고분을 영류왕릉(榮留王陵)으로 비정하고, 그와 같은 서열인 오회분 3호 고분을 영류왕과 형제 관계인 영양왕릉으로 비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고분의 규모나 주변 시설로 보아 오회분 다섯 고분의 피장자는 모두 고구려의 유력층 인사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들 고분을 왕릉으로 비정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근거가 필요해 보인다. 특히 평양 천도 이후 재위한 왕의 경우 더욱 그렇다. 고구려에 귀장(歸葬) 풍속이 있었는지도 논란이 되는 상황인데다 왕릉에 비정될 만한 대형 고분들이 평양 지역에 존재하는 상황에서 평양 천도 이후의 왕릉을 굳이 집안 지역에서 찾아야 할 이유가 있을지 의문이다. 때문에 이러한 비정에 대해서는 더 신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 조선 총독부, 『조선 고적 도보』2(명저 출판사, 1915)
  • 池內宏, 『通溝』 卷上(日滿文化協會, 1939)
  • 길림성문물지편위회, 『집안현문물지』(1984)
  • 孙仁杰·迟勇, 『集安高句麗墓葬』(香港亞洲出版社, 2007)
  • 장복유·손인걸·지용, 『고구려 왕릉 통고』(홍콩 아세아 출판사, 2007)
  • 장복유, 『고구려 왕릉 통감』(홍콩 아세아 출판사, 2007)
  • 길림성 문물 고고 연구소·집안시 박물관 편저,『통구 고묘군』(과학 출판사, 2002)
  • 강현숙·백종오·여호규 외,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유물 2-집안 통구 분지편』(동북아역사재단,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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