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四神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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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 四神冢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 과수촌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성격 | 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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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흙무지 돌방 벽화 고분[봉토 석실 벽화 고분(封土石室壁畵古墳)] |
크기(높이 | 높이 8m |
지름) | (한 변의 길이)25m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35년 10월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36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50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56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1년 가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57년 4월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6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4년 5월∼7월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7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3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4년 7월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4년∼2005년 |
보수|복원 시기/일시 | 1962년 이후 몇 년간 |
소재지 | 집안시 태왕진 과수촌의 우산하 고분군북위 41°08′253″,동경 126°11′825″ |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의 통구 고분군(通溝古墳群) 산하 우산하 고분군(禹山下古墳群)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벽화 고분.
사신총은 집안시 태왕진(太王鎭) 과수촌(果樹村)의 우산하 고분군에 자리한다. 우산하 고분군에서도 가운데 남쪽 끝에 위치한다. 중심 지리 좌표는 북위 41°08′253″, 동경 126°11′825″이고, 고분 정상부의 해발 고도는 223m이다. 고분의 동북쪽으로 160m 지점에는 JYM2114호 고분이 있고, 서쪽으로 30m 정도를 가면 JYM2112호 고분이 있다. 남쪽 30m 지점에는 오회분 4호 고분[JYM2104]이 있으며 북쪽으로 약 120m 지점에는 JYM2115호 고분이 있다.
사신총은 1935년 10월 사이토 기쿠다로[齋藤菊太郞], 시치다 타다시[七田忠志] 등에 의해 첫 조사가 실시되었다. 사신총 주변에는 돌을 깔아 묘역을 표기하였는데 이러한 시설은 태왕릉(太王陵), 장군총(將軍塚) 등에서도 보이는 것이다. 고분 내부의 반 이상이 외부에 노출된 상태에서 무덤문을 열고 조사 작업을 하였다. 외부 공기와의 급격한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벽화가 변색되는 등 손상이 있었다.
조사에서는 벽화의 모사도도 제작하였다.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도 이 조사에 참여하였다. 이 무렵 고분은 사신총, 집안 서강 사신총(集安西崗四神冢), 서강 60호분(西崗60號墳), 통구 7호분(通溝7號墳) 등으로 불렸다. 1936년에는 미카미 쓰구오[三上次男]에 의한 조사가 있었고 조사 내용은 『고구려와 발해(高句麗と渤海)』에 실려 있다.
1950년에 고분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1956년 봄, 집안현 문화과가 고분 입구를 봉쇄하였고, 1961년 가을에는 고분의 입구가 폐쇄되었다. 1957년 4월, 길림성 박물관이 전체적으로 고분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신총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졌다. 1962년 이래로 봉분 수리, 무덤 문 수리, 벽화에 대한 화학적 보존 처리 등이 수차례 이루어졌다. 1963년 6월에는 고분 앞에 나무로 된 설명 표지판을 세웠다.
1966년 길림성 박물관, 집안현 문물보관소 주도로 통구 고분군 전체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및 편호 작업이 있었는데, 이 때 사신총은 집안 통구 고묘군 우산 묘구 제2112호묘[JYM2112]라는 편호를 부여받았다. 1994년 5∼7월에 다시 집안시 박물관이 정리와 조사를 진행하였다. 1997년에는 길림성 문물 고고 연구소, 집안시 박물관에 의한 재조사, 실측 작업이 진행되었다. 2003년 사신총에 대한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새로운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2004년 7월에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2004∼2005년에는 손인걸(孫仁杰)·지용(遲勇) 등이 고분을 다시 조사하였고, 이 과정에서 기와편을 수습하였다.
사신총의 외형은 방형의 밑변에서 위로 올라가다가 위가 살짝 잘린 듯 마무리된,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이다. 고분의 규모는 『통구 고묘군』에서는 한 변의 길이가 25m 이고 높이가 8m라고 한 반면, 『집안 고구려 묘장』에서는 둘레 120m, 높이 7m라고 하였다.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 구조이며 방향은 서쪽으로 25° 기운 남향이다.
『고구려 고묘 벽화 연구』에 따르면, 널길은 길이가 21m, 가장 넓은 부분의 너비가 1.8m, 높이가 1.8m, 널방은 방형이며 너비와 길이가 3.7m, 높이는 3.4m라고 하였다. 널방은 잘 다듬어진 석회암 판석으로 만들어졌다. 천정 구조는 평행 고임 1단 위에 삼각 고임을 2단 얹은 평행 삼각 고임이다. 널방 가운데 돌 관대 두 개가 놓여있다. 북벽에는 동서 방향으로 두 개의 돌상이, 서벽에도 남북 방향으로 돌상 한 개가 놓여 있다. 벽 위에 그대로 벽화를 그렸으며 널길, 널방의 벽, 천정의 벽화가 아직 남아 있다. 벽화는 사신도를 주요 제재로 하였지만 이와 함께 선인, 복희(伏羲), 여와(女媧) 등 다양한 내용을 형상화하였다.
널길에는 동벽과 서벽 양쪽에 문지기 무사가 서 있다. 이들 수문장들은 창을 들고 있거나 악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지만, 벽화의 손상이 심해 정확히는 알기 어렵다. 널방의 네 벽에는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 등 사신을 그렸다. 배경에는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무늬를 배치하였다.
동벽에는 남쪽으로 내려오는 형상의 청룡이 있다. 등이 황색으로 표현되었고 몸통이 다섯 가지 색으로 채색되었다. 서벽에도 남쪽을 향해 달려오는 백호가 그려져 있다. 흰색 몸통에 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다. 거북이와 뱀이 얽혀있는 형상인 현무는 북벽의 구름 사이에서 볼 수 있다. 사신총의 현무도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현무도 중에서도 특히 잘 그려진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남벽은 널길로 가는 입구가 벽을 둘로 나누고 있는데, 남벽의 양쪽에 주작이 마주보고 있다. 주작은 두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려는 자세이다. 널방의 네 모서리에는 기둥을 받치고 있는 괴수가 그려져 있다.
천정의 평행 고임에는 인동문을 연속해서 배치함으로써 장식 효과를 높였다. 천정에는 해, 달, 별, 용 등과 같은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삼각 고임 1단의 아랫면에는 운문과 용, 새나 짐승을 탄 선인들이 그려져 있다. 동남과 동북면에서는 각각 두 선인이 용을 타고 달리고 있다. 서북면에서는 호랑이, 사슴, 말을 타고 있는 선인을 볼 수 있다.
삼각 고임의 동서 두 모서리 면에서는 삼족오(三足烏)가 있는 해와 두꺼비가 있는 달을 그렸다. 남북의 두 모서리에는 귀면(鬼面)을 그려놓았다. 평행 고임의 동면에는 해신과 달신이 그려져 있다. 서면에는 보리수 아래 앉아 그림을 그리는 화가, 어떤 짐승이 뱀을 잡아먹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남면에는 별자리와 새를, 북면에는 북두칠성과 귀면 그림을 배치하였다.
사신총에서 출토된 유물은 많지 않다. 우선 널길의 토사 속에서 금제 보요가 발견되었는데 금실이 붙어 있었다. 또한 널방의 동북 모서리에서는 나무 조각이 4점 발견되었는데 제일 큰 것은 2척에 이른다. 흑칠(黑漆)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목관(木棺)의 일부로 생각된다.
2004년 7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국가 차원에서 보호하고 있다.
사신총은 널길-널방으로 된 외방 구조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주제는 생활 풍속계 벽화가 먼저 등장하고 거기에 점차 장식 무늬나 사신이 같이 배치되다가 나중에는 사신도로 변해 간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이다. 사신총은 외방 구조에 사신도가 그려진 전형적인 사신도 고분의 유형을 보여준다. 때문에 4세기 중반으로 편년한 이여성(李如星)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사신총을 6세기 이후로 편년하고 있다.
한편 사신총은 고분의 규모나 화려한 벽화 때문에 왕릉에 비정되기도 한다. 손인걸·지용은 고분의 규모와 화려한 벽화 등은 피장자가 왕임을 말해준다고 하였고, 장복유(張福有)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사신총을 평원왕릉(平原王陵)이라 하였다. 고분의 웅대함, 벽화의 내용과 그 화려함은 고분의 피장자가 상당한 정도의 부와 권세를 누렸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재위한 왕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고, 왕의 장례 자체가 의미를 가지는 일이므로 왕릉의 비정에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사신총은 6세기 이후로 편년되고 있으며 이는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고도 한참이 지난 시기이다. 고구려에 귀장(歸葬) 풍속이 있었는지에 대한 논의조차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인데다, 평양 지역에도 왕릉에 비정할 만한 고분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이는 평양 천도 이후 왕릉은 평양 지역에 조영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사신총을 왕릉, 나아가 평원왕릉에 비정하는 견해는 그대로 따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