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五盔墳 1號 古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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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 五盔坟1号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 과수촌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성격 | 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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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기단식 흙무지 돌방무덤(기단봉토석실분) |
크기(높이 | 8m |
지름) | (한 변의 길이) 각 25m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09∼1910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35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2년 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6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4년 7월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4년∼2005년 |
보수|복원 시기/일시 | 1962년 봄 |
소재지 | 집안시 태왕진 과수촌 우산하 고분군북위 41°08′072″, 동경 126°11′560″ |
길림성(吉林省) 통화시(通化市) 집안시(集安市)통구 고분군(通溝古墳群) 산하 우산하 고분군(禹山下古墳群)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무덤.
오회분 1호 고분은 우산하 고분군 서남쪽 끝에 있다. 고분 정상부의 해발 고도는 211m이며, 오회분의 다섯 고분 중 가장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오회분 1호 고분으로 불린다. 북쪽으로 30m 정도 지점에는 동서로 배열된 사회분(四盔墳)이 자리한다. 서쪽으로 경작지를 지나 약 500m 지점에는 동대자(東臺子) 유적이 있다. 남쪽으로 80m 떨어진 지점에 집안-과수장(果樹場) 간 도로가 있다.
1909년부터 1910년 사이에 야쓰이 사이이치[谷井濟一], 구리야마 슌이치[栗山俊一]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 학자들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1935년에는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구로다 겐지[黑田源次],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미카미 쓰구오[三上次男] 등이 집안의 도성, 중요 고분을 조사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오회분도 함께 조사되었다.
1962년 봄, 길림성 박물관과 집안현 문물보관소에서 조사를 진행하였고, 같은 해 무덤의 봉토를 더하여 보존하였다. 1966년에는 통구 고분군을 조사, 실측하면서 오회분 1호 고분에 우산하 2101호묘[JYM2101]라는 편호를 부여하였다. 이후 수년간 여러 차례 대규모 조사와 동시에 보존 진행하였다. 2004년 7월에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2004∼2005년에 걸쳐 장복유(張福有)·손인걸(孫仁杰)·지용(遲勇) 등이 수차례 조사와 실측을 진행하였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회색 암키와와 수키와를 다수 수습하였다.
오회분 1호 고분의 외형은 밑면이 방형인 상태에서 올라가다가 맨 윗부분이 잘린 듯 처리된, 이른바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이다. 봉분의 크기는 『통구 고묘군』에 의하면, 밑면 한 변의 길이가 각 25m, 높이가 8m이다. 반면 『집안 고구려 묘장』에서는 분묘의 크기를 둘레 120m, 높이 6m라고 하였다. 발굴이 되지 않아 고분의 내부 구조는 알 수 없다. 고분의 입구는 남쪽으로 나 있다. 돌로 만든 기단이 있었으나 흙에 덮이거나 유실되었다.
2003년 보수 작업 과정에서 고분 주변 30m 영역에 강자갈이 깔려 있는 흔적이 발견되었다. 자갈의 크기는 비교적 고르며 대개 지름 0.15∼0.20m의 크기이다. 고분의 북측 30m 지점에는 사회분과의 사이에 동서로 배열된 돌이 있다. 돌은 대부분 흙에 묻혀 있어서 축조된 길이 등이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석재는 화강암으로 길이 0.8m, 너비 0.4m, 높이 0.3m 정도이다.
오회분 1호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로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2004∼2005년 장복유·손인걸·지용 등이 고분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수습한 기와편이 있다. 우선 고분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편은 암키와와 수키와가 섞여 있으며 색깔은 회색이다. 바깥쪽에는 새끼줄무늬, 안쪽에는 베무늬가 있다. 오회분 서남쪽 약 50m 지점에서도 기와편이 수습되었는데 이들은 홍색을 띤다. 역시 바깥 면에는 바둑판무늬[방격문(方格文)], 석문(席文) 등이 있고, 안쪽 면에서는 베무늬가 확인된다. 기와편이 발견된 지점은 오회분 1호 고분과 상관이 있는 유적으로 보인다. 약 100㎡ 정도의 영역에 기와가 흩어져 있고 지표가 솟아있는 것을 보면 건물지로 생각할 수 있다. 수묘(守墓)나 제사 등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2004년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오회분은 연이어 있는 5개의 고분 모양이 투구(盔)와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회분에는 다섯 개의 고분이 나란히 있지만 1, 2호 고분과 3, 4, 5호 고분 사이에는 다소 간격이 있다. 이 때문에 고분을 조사한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서쪽의 두 고분, 즉 1호와 2호 고분을 ‘이총(二塚)’, 3, 4, 5호 고분을 ‘삼총(三塚)’이라 부르기도 했다[『通溝』 권상]. 오회분 1호 고분과 오회분 2호 고분은 상관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오회분의 분포를 보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시간적인 순서도 말해 준다면, 오회분 1호 고분은 오회분 중 가장 먼저 축조된 고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오회분의 북쪽에 있는 사회분은 같은 묘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오회분의 배총일 가능성도 있다.
장복유·손인걸·지용은 왕릉 지역 내에 매장되어 귀장(歸葬)한 왕릉이라 추정하고 구체적인 피장자를 제22대 왕인 안장왕(安藏王)으로 보기도 하였다. 고분 주변에 회색 기와가 보이고 서남쪽에 수묘나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유적지가 있다. 고분의 규모가 크고 묘역을 조성한 흔적도 있으므로 고위급 인물의 무덤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고구려의 귀장 풍속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평양 지역에 왕릉에 비정될 만한 대형 고분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평양 천도 이후의 왕릉을 굳이 집안 지역에서 찾아야 할 이유가 희박하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