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총

한자 將軍塚
중문 将军冢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 과수촌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문물|보호단위등급 중국 전국문물보호단위
조성 시기/일시 5세기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07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35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3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6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77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0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3년
보수|복원 시기/일시 1979년
보수|복원 시기/일시 1985년
보수|복원 시기/일시 1994년
문물 지정 일시 1961년 3월 4일
소재지 길림성 통화시집안시 태왕진 과수촌 3조
정의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태왕진(太王鎭)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

개설

장군총통구 고분군(通溝古墳群) 중 가장 규모가 큰 우산하 고분군(禹山下古墳群) 내에 있다. 대형 계단식 돌무지 돌방무덤[계단 석실 적석묘]이며, 통구 고분군의 돌무지무덤 가운데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고, 돌무지무덤의 축조 기술상 가장 완성된 형식이다.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1966년 중국 정부에서 우산하 1호분으로 편호했다. 고분은 산기슭의 평탄면에 계단상으로 축조했으며, 각 변의 길이는 30~31m 전후로서 본래 정방형이며 각 모서리의 방향은 4방의 방위각과 일치한다. 일찍부터 현지 주민들이 장군총이라 불렀고 동방의 금자탑이라고도 지칭되었다.

위치

장군총은 길림성 집안시의 통구 고분군 가운데 우산하 고분군의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집안시 태왕진 과수촌(果樹村) 3조(組)에 해당한다. 집안 시가지에서 동쪽 7.5㎞ 떨어진 용산(龍山) 남록에 자리 잡고 있는데, 남쪽 1.5㎞ 지점에 임강총(臨江塚)이, 서남쪽 2㎞ 지점에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태왕릉(太王陵)이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07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에두아르 샤반느(E. Chavannes)가 장군총의 묘실에서 마을 주민들이 모시던 목패(木牌)를 발견하였는데, 윗면에 호태왕(好太王)의 자리라고 쓰여 있다고 하여 호태왕의 능묘라고 기록했다. 그 뒤 일본 학자와 중국 학자들이 여러 차례 조사하였는데, 1935년에 일본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등이 전체 현황을 조사하고 실측을 진행하였고, 1963년에는 중국의 집안시 문물보관소가 분구의 충적토를 정리하면서 많은 유물을 출토하였다. 그리고 1997년에는 장군총과 배총을 상세하게 실측하였으며, 2000년에는 2호 배총을 발굴하였고, 2003년에는 지질 조사와 더불어 서측 건물 터를 발굴하였다.

형태

장군총은 먼저 지면을 파서 그 안에 작은 냇돌이나 산돌을 채워 기초를 다진 후 커다란 지대석을 놓아 한 변 32.3m 전후의 기단부를 조성하고, 그 외곽에는 두께 10∼16㎝인 커다란 냇돌을 너비 3∼4m로 채워 침식 등에 의한 붕괴를 방지했다. 그런 다음 기단부 위의 가장 외곽에 거대한 화강암 장대석을 3∼4단 쌓아 제1층 계단을 조성하고 내부를 냇돌과 산돌로 채워 넣는 방식으로 총 7층의 계단을 축조했다. 모든 계단석은 아주 정치하게 가공했는데, 가장자리에 턱을 만들어 위쪽 계단석이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했다. 또한 계단 둘레에는 커다란 보호석을 각 면마다 3개씩 세워 놓았고, 각 층의 계단을 안으로 1m 정도 들여쌓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계단 축조에 사용된 장대석은 모두 1177매인데 현재 31매가 결실되어 1146매만 남아 있다. 7층 계단 위 정상부의 높이는 지표에서 13.07m인데, 백회를 섞은 흙으로 봉하였다. 정상부 가장자리 계단석의 윗면에는 둥근 홈이 일정 간격으로 파여 있는데, 목조 건축물이나 구조물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매장 주체부는 돌방으로 조성했는데 정상부에 위치한 천추총(千秋塚)이나 태왕릉과 달리 제3층 계단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돌방의 한 변은 5.43∼5.5m로서 거의 정방형이며, 높이는 5.1m로서 잘 다듬은 장대석을 안으로 약간 기울어지게 6단으로 쌓아 올렸다. 평행 고임을 한 다음 거대한 천정석 1매로 상부를 덮었다. 무덤칸 바닥에는 판석을 깔고, 관대 2개를 0.5m 간격으로 놓았다. 무덤칸 입구는 제5층 계단에 위치하여 널길이 아래쪽으로 경사져 있다.

고분 주위 바닥에는 너비 30m 전후로 강돌을 깔았으며, 서남쪽 30m 거리에서 돌로 쌓은 담장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묘역과 관련된 시설로 추정된다. 2기의 배총(陪塚)과 제대(祭臺)라 불리는 석축 시설도 확인되었다. 배총 서북쪽으로 제대라 불리는 석축 시설이 이어지는데, 길이 58m, 너비 8m, 높이 0.3∼0.8m로서 둘레에 다듬은 돌로 단을 쌓고 그 내부를 냇돌과 깬돌로 채웠다. 또한 서남쪽 100m 거리에서 남북 길이 100m 동서 너비 40m 전후의 건물 터[담장·문지·배수구 등]가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

장군총에서는 일찍이 연꽃무늬 와당과 기와편, 철제 연결고리, 금동제 비녀 등이 출토되었는데, 최근의 발굴 과정에서도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장군총 남측 흙더미에서는 금동제 머리 장식, 철제 연결고리, 연꽃무늬 와당, 암키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1∼2호 배총에서는 연꽃무늬 와당과 각종 기와편을 비롯하여 철제 끌·철제 집게·철제 정·철제 칼·철제 말편자 등이, 제대라 불리는 석축 시설에서는 순금제 귀고리와 금동제 못신발·금동제 고리 등이 출토되었다. 기와편 가운데 소(小), 어(魚), 십(十), 신(申), 대(大) 등의 명문이 새겨진 경우도 있다.

의의와 평가

장군총은 적석묘 축조 기술상 가장 완성된 형식으로 그 축조 양상이나 배총으로 보아 왕릉임이 거의 명확하다. 이에 종래 산록에 위치했음을 근거로 산상왕릉(山上王陵)으로 비정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국내성(國內城)에서 마지막으로 사망하거나 즉위한 광개토왕(廣開土王)이나 장수왕(長壽王)의 능묘로 비정한다. 고구려에서 수릉제(壽陵制)가 시행되었다고 보는 중국 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장수왕릉으로 비정한다. 이에 비해 한국과 일본 학자들은 태왕릉광개토왕릉비와의 관계에 따라 광개토왕릉 또는 장수왕릉으로 비정하는데, 최근 남한 학계에서는 장수왕릉보다는 광개토왕릉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조금 우세하다.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발전 과정 및 태왕권(太王權)의 확립 등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 關野貞 외, 『朝鮮古蹟圖譜』(1915)
  • 池內宏 외, 『通溝』(1938)
  • 藤田亮策, 「通溝附近の古墳と高句麗墓制」(『朝鮮考古學硏究』, 1948)
  • 『集安縣文物志』,吉林省文化廳, 1984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洞溝古墳群 1997年 調査測繪報告』(2002)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集安高句麗王陵』(文物出版社, 2004)
  • 백승옥, 「광개토대왕릉비의 성격과 장군총의 주인공」(『한국고대사연구』41, 한국고대사학회, 2006)
  • 여호규, 「집안지역 고구려 초대형적석묘의 전개과정과 피장자문제」(『한국고대사연구』41, 한국고대사학회, 2006)
  • 孙仁杰·迟勇, 『集安高句麗墓葬』(香港亞洲出版社,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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