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릉비

한자 廣開土王陵碑
중문 好太王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양식 석비
관련인물 광개토왕
재질 화산암
크기(높이 6.39m
관리자 길림성 문물국
건립 시기/일시 414년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374년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412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7년~1928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61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63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76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82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4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12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4년
현 소재지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
원소재지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
정의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 능묘와 관련된 비석.

개설

광개토왕릉비광개토왕(374~412)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414년에 세웠다. 현전하는 우리나라의 비석 중 가장 거대하며, 왕릉 앞에 세운 최초의 비석이고, 글씨도 제일 크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능비의 내용은 크게 고구려의 건국 설화와 광개토왕의 정복 기사, 능묘를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등 세 가지로 구분된다. 능비를 통해 395년부터 410년까지의 고구려의 대외 팽창 및 백제·신라·가야·동부여·거란·왜 등과의 대외 관계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건립 경위

고구려 19대 광개토왕이 사망한 412년으로부터 2년여 후인 414년에 건립되었다. 광개토왕의 3년상 기간에 능묘가 조성되었고, 탈상한 후에 비석이 건립된 것이다. 장수왕이 선왕인 광개토왕의 죽음으로부터 분열과 붕괴의 위기에 처한 왕국 전체의 재통합과 질서를 호소할 필요를 느끼고 이 비를 건립했다는 견해가 있다. 따라서 비문에서는 고구려 왕가(王家)의 출신 계통을 신성화시켰고 광개토왕뿐 아니라 고구려왕에 의한 지배의 정당성과 절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위치

광개토왕릉비는 조선 시대에도 알려져 있었다. 1447년에 제작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보면,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서쪽으로 강을 건너 140리 쯤에 큰 벌판이 있다. 그 가운데 옛 성(城)이 있는데 세상에서는 대금 황제성(大金皇帝城)이라고 일컫는다. 성 북쪽으로 7리 쯤에는 비석이 있다. 또 그 북쪽에는 돌무덤[石陵] 2기가 있다.”라고 하면서 이 능비의 위치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1487년에 평안 감사로서 압록강변 만포진을 시찰했던 성현(成俔)이 지은 「황성 밖을 바라보며(望皇城郊)」라는 시(詩)에도 능비가 거론되고 있다.

능비는 길림성 집안시의 통구(通溝) 평원, 고구려 옛 도성인 국내성(國內城)의 동쪽 ‘국강(國岡)’이라는 언덕 위에 서 있다. 국내성에서 동북으로 약 5㎞ 떨어져 있으며, 집안 기차역으로부터는 동북으로 약 4㎞ 쯤 떨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태왕릉(太王陵)장군총(將軍塚)이 한눈에 들어온다.

형태

곁에서 능비를 보면 비면이 다듬어지지 않아 마치 물결처럼 굴곡져 있다. 그러나 안으로 파인 부분에도 글씨는 또렷하게 자리 잡고 있다. 돌을 다루는 데는 가히 천부적 재능을 지녔다는 고구려인들이지만, 이 능비의 겉면을 반듯하게 다듬지 않은 이유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능비는 높이가 6.39m로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우리나라의 석비 가운데 광개토왕릉비의 규모가 제일 크다. 그리고 화산암에 새겨진 글자의 크기는 12㎝에 이를 정도로 크다. 이에 걸맞게 능비의 무게는 대략 37톤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한민족이 만든 비석으로는 가장 연대가 이르다. 아울러 고구려 왕릉 앞에 세워진 비석으로는 최초의 사례에 속한다.

금석문

「광개토왕릉비문」은 총 44행, 1,775자에 3개 문단으로 구성되었다. 건국 설화와 정복 전쟁 기사, 그리고 광개토왕의 능묘를 지키고 관리하는 묘지기인 수묘인(守墓人)에 관한 규정으로 짜여졌다. 정복 전쟁 기사는 ‘전쟁의 명분+전쟁 과정+전쟁의 결산’이라는 구조로 구성되었다. 정복 전쟁 기사 앞에 적혀 있는 건국 설화는 광개토왕이 무력을 행사하는 배경과 근거를 제공해 준다. 이러한 점에서 건국 설화와 정복 전쟁이라는 2개의 접속된 문단은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서로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마지막 문단에는 무려 330가(家)나 되는 묘지기들의 출신 지역이 낱낱이 기재되었다. 국내성에 거주하는 고구려인들이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광개토왕릉의 묘지기 가운데 3분의 2는 정복 지역에서 차출하였다. 이들은 광개토왕대에 이룩한 정복 사업의 혁혁한 성과물이기도 했다.

비문의 정복 전쟁 기사에 의하면 광개토왕은 영락 5년[395]에 요하 상류 부근의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 유역으로 진출하여 거란족의 6~700영(營)을 격파하고 많은 가축을 노획한 후 개선하였다. 영락 6년[396]에도 광개토왕의 친정(親征)으로 백제의 왕성을 함락시키고 아화왕(阿花王)[아신왕(阿莘王)]의 항복을 받아낸 후 회군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백제의 58성(城) 700촌(村)을 점령하는 전과(戰果)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영락 10년[400]에 고구려 보기병(步騎兵) 5만 명은 신라 구원을 명분 삼아 낙동강 유역에 출병하였다. 이는 고구려가 오래전부터 기도해 왔던 소백산맥 이남 지역으로의 진출이었다. 이로써 고구려는 신라를 교두보로 가야를 직접 제압하는 동시에, 백제·가야·왜로 이어지는 삼각 동맹 체제를 깨트리려 하는 원대한 남진 의지의 표출한 것이다. 영락 14년[404]에 고구려는 대방(帶方)의 옛 땅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섬멸시켰다. 영락 17년[407]에는 5만의 군대로 백제의 6개 성을 공취하는 동시에 만 벌의 갑옷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자기계(軍資機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마지막으로 영락 20년인 410년에 광개토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금의 두만강(豆滿江) 하류 지역에 소재한 동부여를 정벌하여 개선하는 것으로 전쟁 기사는 마무리되고 있다. 이 전쟁 기사의 마지막에는 광개토왕이 64개 성과 1,400개의 촌락을 지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광개토왕이 점령한 지역은 이보다 훨씬 광활하거니와 후연(後燕)과의 전쟁 기사가 누락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비문의 내용은 백제와의 전쟁에 대한 결산으로 평가된다.

「광개토왕릉비문」에는 문헌 자료에서 찾을 수 없는 고구려인들의 천하관에서 비롯된 긍지와 우월적 사고가 표출되었다.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중국과 대등한 입장임을 과시하면서 “(광개토왕의) 위엄과 씩씩함은 사해(四海)에 떨쳤노라!”라고 자랑하였다. 여기서 ‘사해’는 온 세상을 가리키는데 그 중심국은 고구려를 가리킨다. 이에 자국 시조에 대해 ‘천제(天帝)의 아드님’·‘황천(皇天)의 아드님’과 같은 수식어를 총동원해 그 존엄성을 기렸다. 동일한 선상에서 ‘왕’, 더 나아가 ‘태왕(太王)’으로 호칭한 것은 광개토왕뿐이다. 백제와 신라의 국왕은 ‘주(主)’ 혹은 ‘매금(寐錦)’으로 각각 폄훼시켜 표기하였다. 그리고 고구려가 주변 국가들과 상하 조공 관계를 구축했던 사실을 명기했다.

그 밖에 비문의 내용 중에는 수묘인 연호(守墓人煙戶)에 대한 규정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는 비문이 아니고서는 확인할 수 없는 귀중한 정보이다. 아울러 비문의 서체 역시 고구려 독자적인 서격(書格)을 보인다. 광개토왕릉비는 여러 면에서 고구려인들의 세계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비석임을 알 수 있다.

현황

광개토왕릉비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에는 이끼가 가득 덮여 있었다. 이것을 불로 제거하는 과정에서 금이 가거나 문자가 떨어지는 등 능비가 훼손되었다. 집안 현장(縣長)이었던 유천성(劉天成)이 공상계 인사를 소집하여 돈을 모아 정자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능비를 보호할 목적의 정자는 1927년에 착수하여 1928년에 준공되었다. 1961년에 능비는 문물관리위원회에서 보호 관리하였다. 1963년에는 비각 바깥에 육각형 울타리를 세우고 보호 표지도 설치했다. 1976년에는 능비의 보호를 위해 낡은 비각을 철거했다. 1982년에는 새로운 비각이 완공되었다. 2004년에 집안시 일대 고구려 유적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과정에서 능비 주변을 투명 플라스틱으로 둘러 보호하게 되었다. 아울러 비각 주변에는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였다. 본래 능비 주변에는 건물이 들어서 있었지만 현재는 모두 철거되었고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광개토왕릉비문」은 무덤 주인의 공식적인 시호를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고 표기하였다. 이처럼 길게 열거된 광개토왕의 공식 시호를 통해 광개토왕릉이 ‘국강상’에 소재하였음과 더불어, 광개토왕릉비가 세워진 일대가 국강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널리 영토를 개척하여 (백성들을) 평안하게 해주었다’라는 구절은 광개토왕의 주요 치적(治績)이 영토 확장이었음을 알려준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 쟁점이 되었던 구절은 신묘년(辛卯年) 조였다. 이 구절의 해석 여부에 따라 고대 한일 관계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과거에는 이 구절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고쳤다는 비문 변조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중국의 길림성 고고학연구소장이었던 왕건군(王健群)의 오랜 기간에 걸친 연구 결과 변조설은 잘못된 학설로 판명되었다. 최근에는 능비의 전쟁 기사보다는 묘지기에 관한 규정인 수묘인 연호(守墓人煙戶) 조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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