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태왕릉

한자 太王陵
중문 太王陵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고분
양식 계단식 돌무지돌방무덤[계단석실적석묘]
관련인물 고국양왕
문물|보호단위등급 중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조성 시기/일시 4세기 말 또는 5세기 초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07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05년과 1912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13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35년 9월 28-30일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36년 9월 30일 – 10월 4일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6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0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3년 4월 28일 – 7월 31일
보수|복원 시기/일시 1990년
문물 지정 일시 1961년 3월 4일
소재지 길림성 통화시집안시 태왕진
정의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태왕진(太王鎭)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

개설

태왕릉통구 고분군(通溝古墳群) 중 가장 넓은 면적을 점하고 있는 우산하 고분군(禹山下古墳群) 내에 있다. 일찍이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 벽돌이 출토되어 ‘태왕릉’이라 불려졌고, 왕릉으로 주목을 받았다. 1966년 중국 정부에서 우산하 541호분으로 편호했다. 초대형 계단식 돌무지 돌방무덤[계단 석실 적석묘]이며, 고국양왕릉(故國壤王陵)으로 비정되고 있다.

위치와 자연환경

태왕릉은 길림성 집안시의 통구 고분군 가운데 우산하 고분군의 동남쪽에 위치한다. 남쪽 100m 거리에 집안에서 북한만포(滿浦)로 향하는 철로가 지나가며, 북쪽으로 우산(禹山)의 산록이 이어진다. 동북쪽 360m 거리에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동북쪽 2㎞ 이상 떨어진 거리에 장군총(將軍塚)이 위치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이 바라보인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태왕릉은 1870년대 후반 광개토왕릉비와 함께 발견된 이래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07년 5월에 프랑스의 동양학자 에두아르 샤반느가 태왕릉을 조사했으며, 일본 학자들도 여러 차례 조사하였다. 1905년과 1912년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사와 슌이치[澤俊一] 등이 전체 현황을 조사하였다. 1913년에는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이마니시 류[今西龍], 야쓰이 사이이치[谷井濟一], 구리야마 슌이치[栗山俊一] 등이 정밀 조사와 실측을 하였다.

1935년과 1936년에는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등이 태왕릉을 상세히 조사하고 실측하였다. 1935년 9월 28일∼30일까지 이케우치 히로시, 하마다 고사쿠[浜田耕作],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 오바 쓰네키치[小場恒吉] 등이 또다시 전체 현황을 조사하고 실측하였다. 1936년 9월 30일∼10월 4일까지 이케우치 히로시, 하마다 고사쿠, 우메하라 스에지, 구로다 겐지[黑田源次], 미카미 쓰구오[三上次男] 등이 전체 현황을 조사, 실측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중국에서 여러 차례 조사하였다. 1966년에는 중국의 길림성 박물관, 집안현 문물보관소에서 통구 고분군 전체를 조사하며 우산 묘구 제541호묘[JYM0541]로 편호하였다. 1990년, 길림성 문물 고고 연구소, 집안현 문물보관소에서 고분 위의 도굴 구덩이와 무덤칸을 조사하였다. 2003년 4월 28일~7월 31일까지 길림성 문물 고고 연구소, 집안시 문물보관소에서 태왕릉 곳곳에 대한 발굴을 진행하고, 능원(陵園) 유적을 탐사하였다.

형태

1. 고분의 축조 양상

태왕릉은 경사가 완만한 언덕 정상의 평탄면에 계단상으로 조성했다. 현재 각 변의 길이는 동변 62.5m, 북변 68m, 서변 66m, 남변 63m 등인데 본래 한 변이 62m인 정방형이었다. 각 모서리의 방향은 4방의 방위각과 거의 일치하며, 정상부에 위치한 무덤칸은 서남향이다. 고분은 지면을 파서 대석괴를 1단 놓아 기초부를 조성한 다음, 외곽에 잘 다듬은 화강암 장대석으로 계단을 쌓고 그 내부를 냇돌과 산돌로 채우는 방식으로 층층이 축조했다. 제1층 계단은 높이 4m 전후로 총 8단으로 쌓았는데, 가장 하단의 높이는 1m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안으로 들여쌓으며 높이도 조금씩 체감했다. 계단석 윗면에는 대형 홈을 파서 가장자리에 턱을 만들어 위쪽 계단석이 바깥쪽으로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였다. 제1층 위로 1.5~1.8m씩 안으로 들이면서 층층이 계단상으로 고분을 축조했는데, 현재 8층 계단까지 확인되지만 총 11층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각 변에 보호석을 세워 고분의 붕괴를 방지했는데, 현재 남측 5개, 동측 4개, 북측 2개, 서측 4개 등 총 15개만 남아 있다.

고분의 현재 높이는 14m이고, 정상부는 한 변 24m인 평대를 이루고 있는데, 중앙에 매장 주체부인 무덤칸이 있다. 무덤칸 구조물의 외형은 복두형(覆斗形)이며, 무덤칸 벽체는 안팎 두 겹으로 되어 있다. 무덤칸 평면은 장방형으로 길이 3.24m, 너비 2.96m, 높이 3m이다. 무덤칸 안에는 가형(家形) 돌덧널을 안치했는데, 무덤칸과 돌덧널 사이의 간격은 불과 10~12㎝로서 그 사이에는 매끈하고 동그란 강자갈을 충전했다. 무덤칸 서벽 중앙에 서남향의 연도가 있는데, 길이 5.4m, 너비 1.84m이다. 무덤칸 내부에 안치한 돌덧널은 맞배지붕 가옥 모양이다. 돌덧널 바닥에는 남북으로 나란히 2개의 관대를 놓았는데, 남녀 묘주를 나누어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

2. 능원 등 주변 시설

태왕릉 주변의 바닥에는 석판과 강돌을 깔아 빗물에 의한 바닥면의 침식을 방지했으며, 곳곳에 배수관을 설치하였다. 능원의 범위와 관련하여 남측과 동측에서 담장도 확인되었고, 1940년대만 하더라도 북측과 서측의 담장까지 남아 있었는데, 전체 평면은 사다리꼴이었다. 본래 고분 북측에 배총으로 추정되는 동서 길이 98m, 남북 너비 15~8m인 돌무지가 있었고, 최근 고분 남측 3m 거리에서 돌널무덤 형태의 구조물을 발굴했다. 고분 동측에는 1.5m 간격으로 남북 길이 70여 m, 동서 너비 7~8m 전후인 석대(石臺) 2개를 배치했는데, 제대(祭臺)로 보기도 하지만 명확한 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고분의 동북편 120m 지점에서 한 변 9m인 방형 건물터가 확인되었는데, 기단부만 남아 있고 초석은 없다. 또한 1940년대에 남쪽 180m 거리에서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출토 유물

일찍이 명문 벽돌과 더불어 연꽃무늬 와당, 기와편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특히 화판(花瓣)을 ‘Y’자형으로 부조한 연꽃무늬 와당은 가장 이른 시기의 연꽃무늬 와당으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1990년대 이후 순금과 금동기·청동기·철기·벽돌·기와 등 1000여 건의 유물을 수집했다. 순금제 유물로는 각종 보요(步搖) 장식품 140여 건을 비롯하여 금실·금못·말편자 등이 출토되었다. 금동품 역시 보요 장식품 468건을 비롯하여 다양한 장식품과 마구 등이 출토되었다. 청동기로는 아궁이, 방울, 금나라 동전 등이 출토되었는데, 청동 방울에 “신묘년(辛卯年) / 호대왕(好大王) / ○조령(○造鈴) / 구십육(九十六)”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많은 주목을 받았다. 철기로는 끌[鏨] 등의 공구류, 고리·꺾쇠 등의 각종 재료, 검과 화살촉 등의 무기류가 많이 출토되었다. 또한 명문 벽돌과 더불어 각종 문양 벽돌, 연꽃무늬 와당, 다양한 문양의 암키와와 수키와편 등의 건축 자재가 출토되었다. 회색 항아리편 2건, 귀잔 1건, 유약을 바른 토기 2건, 완(碗) 1건, 도자기 완 1건, 어망추 1건 등의 토기와 자기도 출토되었다. 이러한 출토품은 태왕릉의 조영 연대나 피장자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의의와 평가

태왕릉은 규모가 거대할 뿐 아니라 ‘태왕릉(太王陵)’이라는 명문 벽돌이 출토되어 일찍부터 고구려 왕릉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초창기에는 일본 학자들이 논의를 주도했는데, 광개토왕릉비와의 거리를 중시한 학자들이 광개토왕릉으로 비정한 반면, 능비와 태왕릉·장군총의 방향을 중시한 학자들은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설정했다.

중국 학자들은 고구려에서도 수릉제(壽陵制)가 시행되었다고 보면서 장군총국내성(國內城)에서 즉위한 마지막 왕인 장수왕릉(長壽王陵)으로 설정하고, 광개토왕릉비와 가장 가까이 위치한 태왕릉을 광개토왕릉으로 비정한다.

그렇지만 고구려에서 수릉제가 시행되었다는 근거는 없다. 또한 태왕릉과 광개토왕릉 사이에는 동측 담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출입 시설이 발견된 바 없다. 오히려 최근 조사에서 남측 담장에서 정문으로 추정되는 문지가 확인되었다. 태왕릉의 입구는 능비가 위치한 동쪽이 아니라 남쪽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리고 최근 발견된 청동 방울은 광개토왕이 즉위하던 391년 신묘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 해는 광개토왕의 즉위년인 동시에 고국양왕의 몰년이기도 하다. 이 청동 방울은 고분 출토품이라는 점에서 광개토왕의 즉위보다 고국양왕의 사망과 관련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최근 남한 학계에서는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비정하고, 태왕릉을 391년에 사망한 고국양왕의 능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늘어나고 있다.

참고문헌
  • 池內宏 梅原末治, 『通溝』(上)-滿洲國通化省輯安縣高句麗遺蹟(1938)
  • 『集安縣文物志』,吉林省文化廳, 1984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洞溝古墓群-1997年調査測繪報告』(科學出版社, 2002)
  • 中國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縣博物館, 『集安高句麗王陵』(文物出版社, 2005)
  • 李道學, 「太王陵과 將軍塚의 피장자 문제」(『白山學報』 69, 2004)
  • 이희준, 「太王陵의 墓主는 누구인가」(『한국고고학보』 59, 2006)
  • 여호규, 「집안지역 고구려 초대형적석묘의 전개과정과 피장자문제」(『한국고대사연구』41, 한국고대사학회, 2006)
  • 동북아역사재단 편, 『고구려 왕릉 연구』(동북아역사재단, 2009)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