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우산하 992호 고분

한자 禹山下 992號 古墳
중문 禹山下992号墓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태왕진 우산촌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고분
양식 계단식 돌무지돌굴무덤
크기 전체 규모: 동변 37.5m, 남변 38.5m, 서변 36.5m, 북변 36.1m, 높이 6.5m매장부(추정): 한 변의 길이 4~5m, 깊이 1m 이하
조성 시기/일시 4세기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09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6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3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4년
소재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우산촌 북쪽. N : 41° 8′ 37.4″E : 126° 11′ 56.96″
정의

길림성(吉林省) 통화시(通化市) 집안시(集安市)우산하(禹山下) 지역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

개설

우산하 992호 고분통구 고분군(通溝古墳群)의 6개 권역 중 하나인 우산하 고분군(禹山下古墳群) 내에 있는 무덤이다. 4세기 무렵의 고구려 왕릉으로 보이며, 제15대 미천왕의 2차릉으로 비정되고 있다.

위치

우산하 992호 고분은 집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2.5㎞ 떨어진 태왕진(太王鎭) 우산촌(禹山村) 북쪽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우산(禹山)이 있고, 남쪽으로 압록강(鴨綠江), 동쪽으로 용산(龍山), 서쪽으로 국내성(國內城)이 보인다. 우산 아래의 대체로 북고남저형의 완만한 대지에 위치하며, 주위 지세는 평탄하다. 중심 지리 좌표는 동경 126° 11′ 56.96″, 북위 41° 8′ 37.4″이며, 고분 정상은 해발 234.77m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09년 야쓰이 사이이치[谷井濟一]와 구리야마 슌이치[栗山俊一]가 조사하였다. 1966년 길림성 박물관과 집안현 문물보관소가 통구 고분군에 대한 전면 조사를 실시하였을 때, 이 고분을 우산 묘구(禹山墓區) 992호 고분[JYM0992]이라고 지정하였다. 2003년에는 길림성 문물 고고 연구소에서 무덤의 기초, 계단, 분구 위의 도굴 구덩이 등을 조사함과 아울러, 고분 일부분을 절개하여 단면 조사하고, 동·서·북측에 대한 탐색갱을 조사하였다. 2004년 장복유(張福有)·손인걸(孫仁杰)·지용(遲勇) 등이 집안 경내의 고구려 유적을 전면 재조사할 때도 그 대상이 되었다.

형태

우산하 992호 고분은 대형 계단식 돌무지돌광무덤[적석 광실묘]으로 규모는 동변 37.5m, 남변 38.5m, 서변 36.5m, 북변 36.1m, 높이 6.5m이다. 외관은 방형 평면의 계단상이며, 분구 정상부는 복두형(覆斗形)이며 평면은 방형인데, 그 남쪽으로 도굴갱이 있다. 지면을 평탄하게 정리한 뒤 축조하였다.

계단은 7층인데, 계단 동·남·북 삼면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단 1930년대 철로 건설 때 고분 서면에 있는 돌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서면은 파괴되어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계단석은 화강암 위주이고 소수 회암(灰巖)과 석암(石巖)이 보인다. 석재는 비교적 세밀하고 규격에 맞게 가공하였으며, 대다수는 모서리[능각(稜角)]가 분명하다.

매장부는 무덤 정상부 평면 중앙에 위치하는데 일찍이 도굴로 인해 훼손되었다. 도굴갱은 무덤 정상부 중앙에서 남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위치하며, 구덩이는 장방형으로 길이 17m, 너비 9m, 깊이 약 2.3m이다. 매장부는 장대석으로 네 벽을 축조한 뒤, 강자갈을 바닥에 깐 한 변 4~5m 정도의 정방형으로 여겨진다. 또한 천정석으로 볼 만한 대형 돌과 메운 돌들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천정석이 없는 굴방으로 추정된다. 굴방의 깊이는 1m를 넘지 않는다고 추정된다.

출토 유물

금제 머리꾸미개[보요] 장식, 금제 요엽 등의 금기와 29건의 금동기 및 36건의 동기, 그 밖에 철기와 석기, 토기 등도 출토되었다. 또 와당·수키와·암키와 등의 기와도 출토되었는데, 와당은 25건으로 모두 원형이고 니질의 회색이며 대부분 새털구름 무늬[권운문(卷雲文)] 와당이다. 연꽃무늬 와당은 1건뿐이다.

현황

1966년 우산하 992호 고분으로 지정되기 이전에는 ‘온화보중대총(溫和堡中大塚)’이나 ‘서강 북대총(西崗北大塚)’으로 불리던 무덤이다. 촌락과의 거리가 다소 멀어 민가의 영향이 적었으므로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단 1930년대 철로를 건설하면서 고분 서측면의 돌이 사용되었고, 이로 인해 서측은 이미 파괴된 상태이다.

고분 주변의 관련 유적으로는 동측과 서측의 2개 제대(祭臺)를 들 수 있다. 고분 동쪽 17m 지점에 있는 동측 제대는 장방형 평면에 길이 33.2m, 너비 6~8m, 높이 1m 정도이다. 고분 서쪽 16m 지점에 있는 서측 제대는 손잡이가 있는 도형(刀形) 평면으로 동변 25.5m, 서변 6.5m, 너비 4.5~8.4m, 높이 0.25m 정도이다. 한편 분구 정상에 상당수의 기와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아 무덤 위에 건물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의의와 평가

우산하 992호 고분은 초대형 돌무지무덤 중 하나이므로 왕릉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발전 과정을 보면 굴방이 돌방보다 이르며, 돌방은 4세기 후반에 출현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우산하 992호 고분의 조성 연대는 당연히 그 이전이 될 것이다. 무덤 위에서 출토된 와당 중에 ‘무술(戊戌)’이란 간지가 새겨진 것이 있다. 와당의 풍격이나 매장부의 형태 등을 감안하면, 무술년은 338년으로 보는 편이 맞을 듯하다. 그렇다면 우산하 992호 고분은 338년을 전후한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여겨진다.

이때 주목되는 사건이 바로 모용황(慕容皝)이 미천왕릉(美川王陵)을 도굴하여 미천왕[재위 300~331]의 시신을 탈취한 지 1년만인 343년에 그 시신을 고구려에 돌려준 일이다. 아마도 이때 고구려 왕실에서는 새롭게 미천왕의 왕릉을 조영하였을 텐데, 그것이 바로 우산하 992호 고분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산하 992호 고분은 미천왕 2차릉일 가능성이 있다.

우산하 992호 고분은 동·서 2개의 제대가 있고, 무덤 위에 건물이 조성된 흔적을 추정할 수 있으므로. 4세기 고구려 능원제의 발달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무덤이다.

참고문헌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集安高句麗王陵』(文物出版社, 2004)
  • 孫仁杰·遲勇 지음, 동북아역사재단 번역, 『집안 고구려 고분』(동북아역사재단, 2007)
  • 동북아역사재단 편,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유물Ⅱ-집안 통구분지편』(진안진, 2008)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