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산 211호 고분

한자 七星山 211號 古墳
중문 七星山211号墓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고분
양식 돌무지무덤
크기(높이 남변 58m, 동변 66m, 동쪽 모서리 높이 14.52m
문물|보호단위등급 세계 문화 유산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6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70년대말~1980년대 중반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7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3년 4월 9일~2003년 6월 20일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4~2005년
소재지 집안시 통구촌 6조N : 41° 7'2.74"E : 126°9'54.74"
정의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태왕진(太王鎭)칠성산 고분군(七星山古墳群)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

개설

칠성산 211호 고분통구 고분군(通溝古墳群)의 6개 권역 중 칠성산 고분군 내에 있다. 칠성산 고분군의 고분 가운데 가장 크며, 3세기 후반~4세기 초·중반에 축조된 왕릉급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위치

칠성산 211호 고분칠성산 고분군 최남단에 자리하고 있다. 집안시 교외 통구촌(通溝村) 6조(組) 서북측 산기슭 대지 위에 위치한다. 이 산기슭은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은데 높이 차이는 7m이다. 대지의 동남면은 충적 평지로 동북쪽에 집안시구가 위치한다. 동남쪽 1.2㎞ 지점에 압록강(鴨綠江)이 있고, 동북쪽에 북쪽으로부터 남류하는 통구하(通溝河)가 있는데, 강 건너편으로 국내성(國內城) 서벽이 보인다. 서북쪽으로 칠성산이 있으며 그 산기슭 남쪽에 고구려 중기·후기의 고분이 다수 분포하고 있지만, 칠성산 211호 고분의 주변에는 다른 무덤이 없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발굴은 크게 5차례 실시되었다. 제1차 조사는 1966년에 길림성 박물관과 집안현 문물보관소에 의해 이루어졌다. 통구 고분군에 대한 수차례의 실측 조사를 통해 이 고분을 211호분[JQM0211]이라고 편호하였다. 제2차 조사는 1970년대 후반~1980년 중반에 집안현 문물보관소에 의해 이루어졌다. 여러 차례의 조사를 통해 다수의 기와편을 수습하고 왕릉으로 비정하였다. 제3차 조사는 1997년 이루어졌는데, 이로써 왕릉이라고 확정하였다. 제4차 조사는 2003년 길림성 문물 고고 연구소에 의해 이루어졌다[4월 9일~6월 20일]. 집안 중점 문물의 환경정비[보수] 작업과 아울러 조사·정리·실측이 실시되었고, 주변 지역의 시굴 조사로 능구(陵區)의 범위와 시설 탐사를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1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제5차 조사는 장복유(張福有)·손인걸(孫仁杰)·지용(遲勇)이 하였는데, 이를 통해 이전보다 한층 정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형태

칠성산 211호 고분은 대형 계단식 돌무지 돌굴무덤[계단 광실 적석묘]이다. 남변 길이 58m, 동서 너비 66m이다. 칠성산 고분군의 고분 가운데 가장 큰 초대형급으로 평면은 방형이다. 화강암석 기단을 쌓은 다음 흙무지 돌방무덤[석실 봉토분]을 축조하였다. 계단은 인위적인 파괴로 인해 명확한 단수를 알기 어렵다. 다만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서남쪽 모서리에 3단의 계단이 남아 있다. 봉토 둘레의 길이는 150m, 잔고는 8m이다.

출토 유물

출토 유물은 모두 무덤의 서측에서 출토되었다. 둘레돌의 틈과 쌓여진 흙에서 출토되었다. 기와는 대부분 무덤 아래쪽에서 흘러내린 돌 가운데에서 나왔다. 아직 전면적인 수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출토 유물로는 금동제 투고 사엽형 장식·금동제 원형 보요·금동제 칠각형 연접 장식·금동제 띠형 장식·동제 장말걸이 쇠·동제 못·마노 구슬·청자편을 비롯해 다수의 기와편이 있다.

현황

일찍이 도굴을 당해 중앙부에 도굴갱이 생겼는데, 이 도굴갱이 무덤을 반으로 나누고 있다. 도굴갱은 서북-동남 방향으로 형성되었는데, 지표면까지 파내려갔다. 고분의 주변에는 회색 기와편이 널려 있다. 고분의 북쪽으로 12m 지점에 장방형의 돌무지가 쌓여 있는데, 제대(祭臺)로 추정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칠성산 211호 고분의 계단 구조는 층층이 쌓은 계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1단 계단을 축성한 다음, 계단 내에 돌들을 평평히 치우고 그 위쪽 안으로 2단 계단을 들여서 쌓는 방식으로 무덤 정상까지 축조하였다. 계장식 계단 구조보다 연대가 늦다. 다만 석재가 비교적 작고 대부분 자연석으로 약간의 가공을 한 것으로 보아, 동일한 구조의 고분 중에는 연대가 비교적 이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출토 유물을 보면 금동 장식의 금동 기술이 높지 않고 대부분 벗겨지며 도금을 이루는 색이 황백색임으로 보아 시기가 이르다고 판단된다. 이와 함께 와당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와당이 사용되기 시작한 3세기 후반~4세기 초·중반의 고분으로 추정된다. 이 점에서 이 고분의 묘주는 서천왕(西川王)~봉상왕(烽上王) 내지 왕실 인물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참고문헌
  • 여호규, 「집안지역 고구려 초대형적석묘의 전개과정과 피장자문제」(『한국고대사연구』41, 한국고대사학회, 2006)
  • 여호규, 「고구려의 장지명 왕호와 왕릉비정」(『고구려 왕릉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9)
  • 『중국소재 고구려 유적·유물2-집안통구분지편-』(동북아역사재단,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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