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禹山下 古墳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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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 禹山墓区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하해방촌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성격 | 고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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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07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09~1910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13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13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35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35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36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39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2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8년 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68년 가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76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4~1985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7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5년 |
소재지 |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 우산촌 우산 |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태왕향(太王鄕) 우산촌(禹山村)의 우산(禹山) 아래 있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군.
우산하 고분군은 집안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통구 고분군(通溝古墳群) 6개 구역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고분군으로 범위가 가장 넓으며, 3,680여 기가 존재하고 있다. 대표적인 고분으로 무용총(舞踊塚)·각저총(角抵塚)·통구 12호 고분·오회분(五盔墳) 4호 고분·오회분 5호 고분·산연화총(散蓮花塚)·사신총(四神塚)·삼실총(三室塚)·우산하 41호분 등 벽화로 유명한 흙무지 돌방무덤이 있고, 장군총·태왕릉(太王陵)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고분과 우산하 1080호분과 같은 돌무지무덤들이 산재해 있다.
무용총이란 명칭은 1935년 조사 당시 널방 왼쪽 벽에 그려진 무용 그림으로 인해 붙여진 것이다. 이 무덤은 흙무지 돌방무덤[봉토 석실분(封土石室墳)]으로, 외형은 위쪽이 평평하고 네모진 모양[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이다. 무덤 내부는 널길, 좌우의 곁칸,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 무덤이다. 무덤칸의 방향은 서쪽으로 50 기울어진 남향이다. 벽화로는 벽면에 무용도를 비롯하여 수렵도, 스님의 설법을 듣고 있는 묘주인도, 우차·나무 등이 그려졌고, 천장에는 연꽃, 해와 달, 별자리, 서수, 신들로 구성되어 있다. 5세기 전반에 유행한 초상 풍속도 벽화 고분의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각저총은 무용총과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흙무지 돌방무덤으로 외형과 구조도 비슷하여 위쪽이 평평하고 네모진 모양에 널길, 좌우의 곁칸, 이음길, 널방의 두방 무덤으로 되어 있다. 무덤칸 방향도 무용총과 같다. 벽면의 벽화로는 이 무덤 명칭의 바탕이 된 씨름 장면이 있고, 이외 묘주 부부도, 부엌, 우차와 마부, 나무 등이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당초문(唐草文)이 가득한 가운에 해와 달, 별자리가 베풀어져 있다. 이 역시 5세기 전반에 조성된 초상 풍속도 벽화 고분이다.
통구 12호묘는 우산 남쪽 기슭의 낮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1939년 일본인 구로다 겐지[黑田源次]에 의해 조사되었다. 처음에는 통구 112호분으로 명명했고, 이후 집안 서강(輯安西崗) 12호 쌍실분, 서강 122호분, 통구 20호분, 통구 연실 고분(通溝連室古墳) 등으로 불렸다. 흙무지 돌방무덤으로 외형은 절두방추형인데, 대형 석재 9매가 흙무지 밑을 받치고 있다. 무덤 내부에는 널길 입구가 이어진 각기 독립된 남북 두 개의 돌방무덤이 있다. 각 무덤칸의 방향은 남으로 8 기운 서향이다. 남분의 벽면에는 묘주 부부도를 비롯하여 사냥하는 장면, 부엌, 마구간, 행렬도, 맹견, 무악 등의 장면이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연꽃문으로 가득 차 있다. 북분의 벽면에는 묘주 부부도, 전투 장면, 맹견, 사냥하는 장면 여인 등이 그려졌고, 천장에 연꽃문이 베풀어져 있다. 5세기 중엽에 조성된 초상 풍속도 벽화 고분이다. 오회분 4호묘는 통구 평야 중앙부에 있는 5기의 대형 흙무지 돌방무덤 가운데 하나이다. 무덤 외형은 절두방추형이고,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 무덤이다. 무덤칸의 방향은 동쪽으로 30 기울어진 남향이고, 무덤칸의 위치는 지상이다. 벽면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곡선으로 변형된 귀갑문(龜甲紋)의 얼개 위를 사신이 넘나드는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귀갑문에는 인동문(忍冬文)과 연꽃에서 화생한 천인이 번갈아 배치되었다. 천장에는 해와 달, 별자리, 황룡이 그려졌다. 6세기에 조성된 사신도 벽화 고분으로, 화려하고 다채로운 양식이 돋보인다.
오회분 5호묘는 오회분 4호묘와 나란히 있다. 흙무지 돌방무덤으로 외형, 무덤 구조, 무덤칸 방향, 벽화 등도 오회분 4호묘와 비슷하다. 벽면의 벽화는 사신도가 주제이고, 이 벽화는 곡선으로 변형된 귀갑문의 얼개 위에 사신도를 배치한 형식을 띠고 있다. 다만 귀갑문에는 인동문과 화염문(火炎文)이 번갈아 배치된 점에서 차이가 난다. 천장에는 청룡과 백호가 으르렁거리는 모습의 천장석과 별자리가 그려졌다. 이 역시 6세기에 조성된 사신도 벽화 고분으로 화려하고 다채로운 특색을 보인다.
산연화총은 1907년 프랑스 학자 에두와르 샤반느(Édouard Emmanuel Chavannes)[1865~1918]에 의해 발견되었고, 1913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 의해 조사되면서 무덤칸의 연꽃 그림으로 인해 '산연화총'이라고 명명되었다. 후에 서강 113호분으로도 불렸다. 흙무지 돌방무덤으로 외형은 절두방추형인데, 봉분이 많이 유실되었다. 무덤 내부는 널길, 앞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 무덤이다. 벽화는 연꽃을 주제로 한 장식 문양도이다. 널방의 벽면에는 정면형의 연꽃이 위아래가 어긋나게 배열되고 있고, 천장에는 측면형의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5세기 장식 문양도 벽화 고분으로, 벽면과 천장이 연꽃으로만 장식되어 있다는 점에 특색이다.
사신총은 우산 남쪽 기슭 끝, 오회분 4호묘와 오회분 5호묘 부근에 있는 흙무지 돌방무덤이다. 사신총, 집안 서강 사신총, 서강 60호분, 통구 7호분, 우산 묘구 제2112호묘, 사신묘로 불렸다. 1935년 일본인 사이토 기쿠다로[齋藤菊太郞] 등에 의해 처음 조사되었다. 무덤 외형은 위쪽이 평평하고 네모진 모양[절두방추형]이고,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 무덤이다. 무덤칸의 방향은 남향이다. 벽면에는 사신도가 그려졌는데, 표현 양식은 오회분 4호묘와 비슷하다. 다만 오회분 4호묘처럼 귀갑문의 얼개는 그려지지 않았다. 6세기에 조성된 사신도 벽화 고분이다.
삼실총은 우산의 남쪽 기슭 끝에 자리 잡은 흙무지 돌방무덤이다. 널길과 이음길로 세 개의 널방이 ㄷ자 모양으로 구성된 특이한 구조의 무덤이다. 우산하 묘구 제2331호묘, 세칸 무덤으로도 불린다. 1913년에 처음 벽화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벽화의 주제는 생활 풍속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실물 크기의 역사와 무사상들이 대거 등장하는 점에 특색이 있다. 5세기 중엽으로 편년되는 풍속도 벽화 고분이다.
우산하 41호분은 우산의 남쪽에 위치한 흙무지 돌방무덤이다. 파괴가 심하나 외부의 밑부분은 계단식으로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석실의 남북 벽면에는 횡으로 35㎝의 간격을 두고서 작은 구멍이 있고 그 부분에 연꽃이 묘사되었다. 벽화는 석실의 네 귀퉁이에 기둥과 들보가 그려졌다. 동벽의 들보 아래에는 가옥이 있고 황색의 장막이 있으며 그 가운데에 묘주로 보이는 남자상이 있다. 묘주의 집에는 연회의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외에는 사슴, 수렵 장면, 인물 등이 그려졌다. 사이호, 금동제 운주, 마구류, 쇠갑옷 조각, 투겁창, 쇠촉 등이 수습되었다. 이 무덤은 절천정총(折天井塚)과 더불어 벽화가 그려진 돌무지무덤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장군총은 잘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하여 방형 7단의 피라미드형으로 만든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우산하 1호분이라고 불린다. 무덤의 방향은 정면이 서남을 향하고 있고, 무덤의 네 모서리가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무덤의 정상부에는 한 개의 타원형 암괴로 덮었고, 그 가장자리로 구멍이 많이 있어 원래 난간이 둘러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1단의 각 면에는 3개씩의 큰 받침돌을 기대어 세웠다. 이 무덤에서 서남쪽 1㎞ 떨어진 지점에 광개토대왕비가 서있어서, 이 무덤이 광개토왕릉이라는 견해가 있다.
태왕릉은 장군총과 같이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7단의 계단으로 추정되고, 무덤의 밑변에는 장군총과 같이 기단에 기대어 놓은 큰 받침돌이 있다. 무덤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밑변 한 변의 길이가 60m 이상으로 통구의 무덤 가운데 최대 규모이다. 이 무덤의 180m 남쪽에서 고구려 기와와 전돌이 발견되고 초석이 있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제사를 지내던 건물로 추정된다. 광개토대왕비가 동북 500m 거리에 있어 장군총보다 가깝고,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의 명문이 새겨진 전돌이 무덤에서 출토된 바 있어 이 무덤을 광개토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우산하 1080호분은 흙무지 돌방무덤으로, 외형은 절두방추형이다. 동남쪽 모서리에 거대하고 잘 다듬은 기단돌이 남아 있다. 본래 도굴되었던 것을 1976년에 발굴 조사했다. 널길, 앞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 무덤이다. 유물은 도굴되었으나 금동제의 장식못, 꾸미개, 가는 고리 등이 수습되었다. 이 무덤에서는 봉분의 동남쪽 모서리에 나 있던 도굴 구덩이에서 돌비석 형태의 석물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이 석물에는 명문이 보이지 않으나 무덤 위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