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통구 고분군

한자 洞溝 古墳群
영문 Ancient Tombs of Tōnggōu
중문 洞沟古墓群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고분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통구평원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고분
문물|보호단위등급 중국제일중점문물보호단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09~1910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13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13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35~1936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2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3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3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3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5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6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8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75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76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78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79~1980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3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3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4~1985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7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5년
문물 지정 일시 1961년
소재지 길림성 집안시 통구 분지 일대
정의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통구 분지(通溝盆地) 일대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고분군.

개설

통구 고분군은 약 12,000기의 고구려고분이 있는 유적이다. 고분은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가면서 마선구(麻線區), 칠성산(七星山), 만보정(萬寶汀), 산성하(山城下), 우산하(禹山下), 하해방(下解放) 고분군 등 6개 권역으로 나누어진다. 통구 분지에서 언제부터 고분이 조성되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여러 고분들을 통해 평양 천도 이후 발해(渤海)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고분이 조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통구 분지는 400여 년 동안 고구려의 도성이 자리한 곳이었다. 따라서 현재 통구 고분군 중에는 왕릉으로 비정되는 고분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위치

통구 고분군은 길림성 집안시통구 분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통구란 이름은 원래 이 지역을 흐르는 통구하(通溝河)에서 유래하였다. 북쪽으로는 우산(禹山)과 용산(龍山)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흘러가는 배산임수 지형의 통구 분지는 좁고 길게 뻗은 압록강 중류 지역의 좁고 긴 충적 평지이다. 서쪽으로는 마선구향(麻線區鄕)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장천촌(長川村)에 이르는 넓은 범위를 가지고 있으며, 분지의 면적은 동서 길이 40㎞, 남북 2~4㎞ 정도이다. 다만 하해방 고분군과 장천 지역의 고분군을 제외한 대부분의 고분들, 즉 마선구·칠성산·만보정·산성하·우산하 고분군국내성(國內城)을 중심으로 한 5~7㎞ 범위 안에 분포하고 있다. 이렇듯 통구 고분군의 다수는 왕도(王都) 국내성으로부터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통구 고분군에 대한 발굴 조사는 일제에 의해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1909~1910년 야쓰이 사이이치[谷井濟一], 구리야마 슌이찌[栗山俊一]가 우산하 고분군 일대의 장군총(將軍塚)·태왕릉(太王陵)·임강총(臨江塚)·오회분(五盔墳) 감실총(龕室塚)·오회분 2~4호 고분·삼실총(三室塚)·귀갑총(龜甲塚) 등을 조사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어 1913년에는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와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이 우산하 고분군태왕릉·삼실총을 재차 조사하였고, 같은 해에 야쓰이 사이이치, 구리야마 슌이찌, 세키노 다다시,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은 마선구 고분군(麻線溝古墳群)서대총(西大墓)·천추총(千秋墓) 등을 살펴보았으며, 특히 천추총을 정밀 조사하였다.

1935년에는 만주국안동성(安東省) 시학관(視學官) 이토[伊藤伊八]의 제안을 받은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미카미 쓰구오[三上次男] 등이 우산하 고분군태왕릉·장군총·무용총(舞踊塚)·삼실총·각저총(角抵塚) 등과 함께, 하해방 고분군모두루총(牟頭婁塚)·환문총(環文塚), 마선구 고분군천추총 등을 조사하였다. 이 조사는 이듬해인 1936년에도 이루어졌으며, 일행은 우산하 고분군태왕릉·장군총·삼실총·사신총(四神塚) 등과, 하해방 고분군모두루총·환문총, 마선구 고분군천추총서대총 등을 대상으로 삼았다.

1945년 이후에는 중국 측이 조사를 주도하게 된다. 먼저 1962년에는 길림성 박물관 주관으로 우산하 고분군통구 12호 고분·오회분 4호 고분·오회분 5호 고분이 조사되었고, 1963년에는 주민들에 의해 하해방 31호 고분이 발견되어 집안현 문물보관소가 조사하였다. 또 같은 해에는 길림성 박물관 및 집안 고고대에 의해 마선 1호 고분이 조사되었으며, 길림시 문물보관소에서는 만보정 고분군(萬寶汀古墳群)의 60여 기 및 산성하 고분군의 9기를 조사하였다. 이어 1965년에 길림시 문물보관소에서 만보정 고분군의 31기를 조사하였고, 1966년에는 길림성 박물관과 집안현 문물보관소의 실측 조사에 의해 하해방 고분군 총 51기가 확인됨과 아울러 산성하 고분군의 21기가 조사되었다. 1968년에는 농지 확장 사업이 추진되면서 봄과 가을에 각기 길림성 박물관과 진상위(陳相偉) 등의 주도로 우산하 고분군 176기와 171기가 조사되었다. 그 밖에 칠성산 고분군의 57기, 만보정 고분군의 45기, 산성하 고분군의 36기, 마선구 고분군의 12기도 발굴 조사하였다.

각 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또 1975년에는 집안현 문물보관소가 칠성산 1096호 고분에 대한 발굴을 실시하였다. 1976년에도 농지 정리를 위해 길림성 박물관 및 집안현 박물관 등의 주관 아래 방기동(方起東)·위존성(魏存成)·임지덕(林至德)·장설암(張雪巖) 등이 참여하여 우산하 고분군의 57기, 산성하 고분군의 154기, 마선구 고분군의 69기, 칠성산 고분군의 26기, 만보정 고분군의 35기 등이 조사되었다. 이어 1978년에는 집안현 문물보관소 주관으로 하해방 고분군의 벽화 고분이 조사되었으며, 군사 시설 건설로 인해 마선구 고분군의 22기가 조사되었다. 1979~1980년에는 집안현 문물보관소 주도로 산성하 고분군의 46기가, 1980년 벽돌 공장 수리로 인해 산성하 고분군의 1기가 조사되었다.

1980년대에도 조사는 이어진다. 1983년 집안시 박물관에서는 산성하 고분군에서만 38기를 조사하였고, 같은 해 집안시 문물조사대는 하해방 31호 고분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1984~1985년에는 집석 공로 예정지에서 길림성 고고연구소와 집안시 문물보관소 주관 아래 임지덕(林至德)·경철화(耿鐵華)·장설암(張雪巖)·손인걸(孫仁杰) 등이 참여하여 우산하 고분군의 113기를 조사하였다. 또 1986년에는 건강 소학교 교사 확장 건설로 인해 마선구 고분군의 5기가 조사되었고, 1987년에는 보험 공사 차고지 건설로 인해 만보정 고분군의 2기가 조사되었으며, 1996년에는 용수로 건설로 인해 만보정 고분군의 20여 기가 조사되었다. 1997년에 이르면 길림성 문물 고고 연구소와 집안시 박물관의 주관 아래 전면적인 실측 조사가 행해지는데, 이때 우산하 고분군에서는 3,471기, 하해방 고분군에서는 50기, 만보정 고분군에서는 1,474기, 칠성산 고분군에서 1,570기, 마선구 고분군에서 2,374기, 산성하 고분군에서 1,843기가 확인되었다. 그 뒤 1999년에는 홍수 피해 후에 만보정 고분군의 15기를, 도로 건설로 인해 마선구 고분군의 6기를 조사하였다. 마지막으로 2005년 집안시 문물국의 조사에서는 우산하 고분군에서 총 3,680기, 하해방 고분군에서 총 52기, 만보정 고분군에서는 총 1,547기, 칠성산 고분군에서 1,638기, 마선구 고분군에서 2,576기, 산성하 고분군에서 1,881기가 확인되었다.

형태

통구 고분군은 크게 돌무지무덤과 흙무지무덤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중에는 돌방 구조를 매장부로 한 흙무지무덤이나 벽화로 무덤칸[묘실(墓室)] 내부를 장식한 돌무지무덤도 있다. 매장 방식으로는 구덩식과 옆트기식이 있다. 구덩식 장법(葬法)의 매장부로는 돌굴과 돌덧널이 있는 반면, 옆트기식 장법의 매장부로는 굴방, 돌방, 벽돌방이 있다. 통구 고분군에서는 돌덧널이 매우 드물고 대부분은 돌굴이다. 석광이나 광실은 묘광(墓壙)에 대응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석광 안에서는 관못(棺釘)이나 꺽쇠가 출토된 사례가 있기 때문에, 나무널[목관(木棺)]이나 나무덧널[목곽(木槨)]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광실의 경우 대형 고분일 때에는 장막걸이쇠가 출토되기도 하므로 목곽보다 큰 목실(木室)이 존재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석곽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시설물로서, 돌로 네 벽을 쌓아 올린 상자와도 같은 형상이다. 한편 전실은 현재 통구 분지에서 극소수만이 확인되었을 뿐이며, 방(室) 구조를 갖춘 무덤들의 대부분은 석실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매장부 구조는 분구와도 어느 정도의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즉 석광과 광실 및 석곽은 적석(積石) 분구와, 석실은 봉토(封土) 분구와 연결되는 경향이 강하다.

적석 분구는 축조 재료와 축조 방식에 따라 무기단식(無基壇式), 기단식(基壇式), 계장식(階墻式), 계단식(階段式)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무기단식은 크고 작은 가공하지 않은 돌들을 이용하여 쌓은 것이다. 다음으로 기단식은 커다란 돌을 이용하여 기단을 만들고 기단 안쪽에 크고 작은 돌들을 채워 넣어 상면을 편평하게 만든 뒤, 그 위에 매장부를 만든 것이다. 기단에 사용된 돌들은 가공하지 않았거나 부분적으로 가공한 것들이 많다. 한편 계단식은 기단식으로 축조한 뒤, 그 위에 같은 방식으로 조금씩 들여 쌓아 전체적으로 보아 계단 형태를 이룬 것이다. 계단식 축조에 사용된 돌들은 대개 가공을 거쳤다는 점이 기단식과 큰 대조를 이룬다. 그 밖에 계장식은 기단식에서 계단식으로 가는 과도기 형태로 분구의 고대화(高大化)를 의도한 것인데, 계단이 가공한 돌을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들여 쌓는 방식이라면, 계장은 가공하지 않은 돌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아가며 쌓는 방식이라는 점이 크게 다르다.

봉토 분구는 대개 방형의 평면을 가지고 있지만, 원형을 띠는 것도 있다. 눈여겨 볼 것은 봉토 분구 아랫 부분[기저(基底)]에 돌로 기단을 만든 기단 봉토 분구이다. 고구려고분이 적석 분구에서 봉토 분구로 변화해 나갔기 때문에, 기단 봉토 분구를 가진 고분은 적석 분구에서 봉토 분구로 이행해가는 과도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전체 고분군에서 기단 봉토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한 점을 본다면, 적석 분구에서 봉토 분구로의 이행과정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고구려고분의 전개 과정을 볼 때 분구는 돌무지무덤에서 흙무지무덤으로 변화하였고, 매장부는 석광에서 광실, 석실로 변화하였다. 변화의 과도기는 4~5세기인데, 이 시기 통구 고분군에서는 돌무지무덤과 함께 기단 봉토분 및 흙무지무덤이 병존하며, 동시에 벽화분도 나타난다. 그러다가 6세기에 이르면 초대형 및 대형 고분은 돌무지무덤이 아니라 흙무지무덤으로 완전히 탈바꿈한다.

출토 유물

통구 고분군에서는 백제나 신라고분들에 비하면 적은 수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이를 토대로 통구 고분군을 조성하였던 고구려인들이 빈약한 매장 습속을 가졌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도굴과 훼손을 당한 고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더욱이 『삼국지』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금·은과 재물을 써서 장례를 후히 치렀다 하니, 원래는 상당한 양의 물품을 넣었다고 여겨진다. 실제 파괴 정도가 심한 무기단 돌무지무덤에서도 상당수의 청동 제품이 출토되었으며, 이른 시기의 석광 적석총에서 생산 용구나 토기·장식품이 나왔고, 4세기 이후의 계단 적석총 단계에서는 병기나 장식성 명기(冥器) 및 철제품이 출토되고 있다.

현황

통구 고분군을 이루는 6개 고분군, 즉 우산하 고분군·하해방 고분군·만보정 고분군·칠성산 고분군·마선구 고분군·산성하 고분군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우산하 고분군통구 고분군 중 가장 넓은 면적을 점하고 있다. 고분은 우산의 남쪽 사면에 위치하며, 북쪽 기슭 중턱에서부터 고분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조성되었다. 돌무지무덤은 주로 우산의 중턱에서부터 완만하게 경사져 내려오는 사면에 분포하고, 흙무지 돌방무덤은 능선의 자락과 완만한 평지에 분포한다. 구릉의 완사면 자락에는 돌무지무덤과 흙무지 돌방무덤이 혼재한다. 한편 돌무지무덤은 동쪽보다 서쪽에 더 많이 분포하는 반면, 흙무지 돌방무덤은 서쪽보다 동쪽에 더 많이 분포한다. 이를 통해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면서 고분이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산하 고분군통구 고분군 중 가장 많은 수의 고분이 분포하는 통구 최대의 고분군임과 함께, 왕릉으로 비정되는 고분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고분군이기도 하다. 우산하 고분군에 현존하는 초대형 고분으로는 장군총·태왕릉·임강총·우산하 992호 고분·우산하 2110호 고분·우산하 2112호 고분·우산하 3319호 고분 등이 있다. 그 밖에 생활 풍속도를 그린 벽화분으로는 각저총·무용총·마조총[통구 12호 고분삼실총·삼연화총 등이 있으며, 사신도를 그린 벽화분으로는 오회분 4호 고분·오회분 5호 고분·사신총 등이 있다.

하해방 고분군은 돌무지무덤이 없이 흙무지무덤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통구 고분군 중에서 가장 늦게 조성된 고분군이다. 고분 대부분은 구릉의 사면에 위치하며, 평지에는 모두루총이 자리한다. 하해방 고분군 중 한 변 15m 이상의 대형분이라 할 수 있는 무덤은 모두루총·하해방 31호 고분·환문총 등이다. 모두루총하해방 31호 고분은 무덤 구조가 408년 무렵 만들어진 덕흥리 고분과 비슷하기 때문에, 대략 5세기 전반에 조성되었다고 여겨진다. 하해방 고분군 가운데 4세기대에 조성된 고분이 있을 가능성은 적다.

만보정 고분군통구 고분군 가운데서 하해방 고분군 다음으로 개체수가 적다. 왕릉에 비정할 만한 고분은 없지만, 주목할 고분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만보정 242호 고분은 3세기 말 횡혈식 장법의 채용 과정을 보여주며, 이는 횡혈식 매장부를 가진 돌무지무덤인 5세기 전반의 만보정 1078호 고분도 마찬가지다. 또 만보정 1368호 고분은 집안 지역에서의 벽화 고분 등장 과정을 알 수 있는 봉토 석실 벽화분이다.

칠성산 고분군을 보면 아직까지 대형 흙무지 돌방무덤이나 봉토 석실 벽화분은 나오지 않았으나, 초대형 돌무지무덤인 칠성산 211호 고분·칠성산 871호 고분은 왕릉에 비정되고 있다.

마선구 고분군에서는 왕릉으로 비정되는 초대형 돌무지무덤과 함께 석실 봉토 벽화분도 확인되었다. 초대형 돌무지무덤으로는 마선구 2378호 고분·마선구 2381호 고분·마선구 626호 고분·마선구 2100호 고분·서대총·천추총 등이 있는데, 이 고분들은 1~4세기대까지의 긴 시간 폭을 가지고 있다. 석실 봉토 벽화분으로는 마선구 1호 고분 1기가 확인되었는데, 이 고분은 그 구조와 벽화 내용 및 부장품 등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산성하 고분군통구 고분군 가운데 우산하 고분군 다음으로 큰 고분군이다. 산성하 고분군은 우산 후편(禹山後片), 산성 하편(山城下片), 남대만자편(南大灣子片), 동대파편(東大坡片), 전창 후편(塼廠後片) 등 5개의 묘역으로 다시 나뉜다. 국내성에서 통구하를 따라 계곡으로 들어가면 나타나는 전창 후편에는 돌무지무덤이 많으므로, 이 지역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고분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통구하 좌안, 환도 산성 동벽 아래의 산성 하편에서는 계단식 돌무지무덤과 흙무지 돌방무덤이 군집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늦은 시기에 고분이 조성되었다고 여겨진다. 여기서만 400여 기의 고분이 확인되었으며, 중대형의 계단식 돌무지무덤과 봉토 석실 벽화분[흙무지 돌방무덤 벽화 고분, 석실 봉토 벽화 고분(石室封土壁畵古墳)]은 고구려 귀족묘이다.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유명한 것은 형총(兄塚)·제총(弟塚)·절천정총(切天井塚)이다. 특히 절천정총에서는 생활 풍속도로 추정되는 벽화편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 돌무지무덤의 벽화 채용 과정을 알 수 있다. 벽화분으로는 귀갑총·미인총·귀갑연화총[산성하 1304호 고분]·산성하 798호 고분·산성하 1405호 고분·산성하 1407호 고분·산성하 1408호 고분 등이 확인되었는데, 대개 생활 풍속도 계열이거나 장식무늬 벽화분이다. 현재 산성하 고분군이 언제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였는지를 알기는 어렵다. 단 산성하 전창 16호 고분이 조성될 즈음부터 통구하를 따라 계곡으로 들어가면서 고분군이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5세기를 전후하여 벽화 고분을 포함한 중형·대형 고분이 산성하 지역에 집중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동대파 365호 고분에서 출토된 암갈색 시유병을 통해 이 고분이 고구려 최말기에 만들어졌다고 여겨지므로, 평양 천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산성하 고분군에 대형분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통구 고분군고구려의 중심지인 국내성환도 산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고구려 시대의 역사를 잘 알 수 있는 유적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통구 고분군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종래에는 왕릉으로 비정되는 초대형 돌무지무덤을 중심으로 한 몇몇 유명 고분들에 관심이 집중되어 왔다. 따라서 고구려사의 이해 반경을 보다 넓히기 위해서는 그간 덜 알려졌던 고분들에 대한 검토가 요구된다.

참고문헌
  • 吉林省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洞溝古墳群-1997年調査測繪報告』(科學出版社, 2002)
  • 동북아역사재단 편,『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유물Ⅱ-집안 통구 분지편』(진인진, 2008)
  • 동북아역사재단 편,『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2-고분과 유물-』(동북아역사재단, 2009)
  • 손인걸·지용 지음, 동북아역사재단 번역, 『집안 고구려 고분』(동북아역사재단, 2007)
  • 여호규, 「집안지역 고구려 초대형적석묘의 전개과정과 피장자문제」(『한국고대사연구』41, 한국고대사학회, 2006)
  • 정호섭, 『고구려 고분의 조영과 제의』(서경 문화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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