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도 산성

한자 丸都 山城
중문 丸都山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성곽
양식 산성
둘레) 6,951m
문물|보호단위등급 중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조성|건립 시기/일시 198년(고구려 산상왕 2)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05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13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36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58년 6월 28일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60년 4월 6일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2년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1~2003년
문물 지정 일시 1982년 2월 23일
현 소재지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N : 41° 09′ 02″, E : 126° 09′ 26.2″
원소재지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N : 41° 09′ 02″, E : 126° 09′ 26.2″
정의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산성.

개설

환도 산성고구려 두 번째 도성인 국내성(國內城)의 군사 방어성으로서 현재 길림성 집안시의 산성자 산성(山城子山城)으로 비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198년(산상왕 2)에 환도성을 축조하기 시작해 209년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 244~245년 조위(曹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했을 때, 그리고 342년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皝)이 침공했을 때 각각 임시 왕성으로 삼았다가 함락 당한 바 있다. 중국 학자들은 대체로 427년 평양 천도 이후 폐기했다고 보지만, 6세기 중반 양원왕대에 ‘환도(丸都)’라는 지명이 여러 차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평양 천도 이후에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건립 경위

『삼국사기』에 따르면 198년(산상왕 2)에 환도성을 축조하기 시작해 209년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한다. 국내 천도 직후 축조했다는 위나암성(尉那巖城)과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어렵다.

환도성을 축조할 무렵 고구려는 왕위 계승전으로 인해 내분에 휩싸여 있었고, 공손씨(公孫氏) 정권의 침공도 임박한 상황이었다. 이에 일본 학자들은 산상왕이 ‘새로운 도성을 건설했다[更作新國]’는 『삼국지』 기사와 연관시켜 이때 졸본(卒本)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했다고 파악한다. 그렇지만 고구려가 국내 지역으로 천도한 것은 1세기 중후반으로 파악된다. 또한 일찍부터 평지 거점과 군사 방어성으로 이루어진 도성체계를 구축했고, 당시에는 공손씨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점에서 환도성은 국내성의 군사 방어성으로 파악된다. 다만 공손씨 정권에 이어 조위(曹魏)도 고구려 침공을 도모했기 때문에 계속 환도성을 임시 왕성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환도성은 246년 조위군에게 함락 당했다. 4세기 전반에도 전연(前燕)의 침공이 임박하자 환도성을 수리해 국내성에서 도성을 옮겼으나, 불과 3개월 뒤에 함락 당했다[342년]. 종래 중국 학자들은 427년 평양 천도 이후 환도성을 폐기했을 것으로 파악했다. 그런데 최근 산성자 산성 내부의 궁전지를 비롯하여 문지, 장대 등에서 5세기 후반 이후의 연꽃무늬 와당 등이 대거 출토되었다. 이로 보아 환도성은 평양 천도 이후에도 계속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이후 『삼국사기』에 ‘환도(丸都)’라는 지명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것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

환도 산성[산성자 산성]은 중국길림성 집안시국내성 터에서 통구하(通溝河)를 따라 북쪽으로 2.5㎞ 떨어진 높은 산에 위치한다. 지리 좌표는 궁전지 북쪽을 기준으로 N: 41° 09′ 02″, E: 126° 09′ 26.2″이다. 산성자 산성이 위치한 산은 해발 652m로서 속칭 환도산으로 불린다. 산성의 동쪽 0.5㎞ 거리에 산성자촌이 있고, 집안 분지에서 북쪽으로 가는 두 갈래 길을 지키고 있어 집안의 관문(關門) 같은 위치에 있다.

형태

환도성(丸都城)은 말 그대로 ‘둥근 모양의 도성’이라는 뜻인데, 산성자 산성은 맞은편 산에서 보면 둥그스름한 외형을 띤다. 북쪽의 지세가 험준하며, 남쪽에 경사가 완만한 평탄지와 산비탈이 형성되어 있다. 동·북·서 삼면의 외곽은 자연 절벽이나 가파른 산비탈이고, 통구하에 잇닿은 남쪽도 수직 절벽인 천혜의 요새지이다.

성벽은 돌로 쌓았는데, 전체 둘레는 6,951m에 달한다. 내벽과 외벽은 쐐기형 돌을 사용하여 퇴물림 방식으로 가지런하게 겉쌓기를 했으며, 안채움부는 쐐기형 돌 안쪽에 길쭉한 북꼴돌을 끼워 넣고 잔돌로 빈틈을 채워 견고하게 속쌓기를 했다. 성벽 윗부분에는 성가퀴가 남아 있는 곳이 많고, 성가퀴 안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돌구멍이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성문 터는 7곳 확인되었는데, 문루의 지붕에 얹었던 기와 조각과 와당 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다. 남문은 성곽 전체의 정문으로서 자연 지세를 활용하여 장방형 옹성 구조를 만들었다. 동벽 남단의 성문이나 남벽 서단의 성문에서도 옹성 구조가 확인되었다. 동벽 안쪽 산기슭 대지에는 규모가 큰 건물터가 있는데 일찍부터 궁전터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최근 발굴 결과 인공으로 조성한 4층 대지에서 11기의 건물터를 확인했다. 부속 시설까지 포함하면 남북 길이 95.5m, 동서 너비 86.5m로서 약간 불규칙한 장방형이다. 각 건물터에서는 각종 건축 자재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그 중에는 ‘소형(小兄)’이라는 고구려 관등명이 새겨진 기와 조각도 있었다. 다만 구들 등 난방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두 차례나 불탔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발굴자들은 246년 조위군, 342년 전연군의 환도성 함락과 연관시켜 파악했다. 그렇지만 3세기 이전의 유물은 출토되지 않은 반면, 5~6세기 와당이 많이 출토된다는 점에서 연대는 더욱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는 평양 천도 이후에도 산성자 산성을 계속 사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남문 뒤쪽의 대지에는 장대가 있는데, 최근 발굴 결과 쐐기형 돌로 가지런하게 축조한 장방형 석대로 밝혀졌다. 장대 북쪽에는 병영 터가 있는데, 현재는 초석만 18개 남아 있다. 산성 내부에는 무기단 돌무지무덤 30기, 방단 돌무지무덤 6기, 봉토묘 2기 등 38기의 고분도 분포하고 있다. 특히 궁전 터 앞의 돌방 흙무지무덤[봉토 석실묘]은 환도 산성의 폐기 시점과 관련하여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의의와 평가

환도 산성은 2세기 말에 고구려 두 번째 도성인 국내성 지역의 방어용 산성으로 축조되었다. 그 이후 환도 산성은 3세기 중반까지 약 50여 년간 임시 왕성으로 사용되었고, 342년도에 전연(前燕)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임시 왕성으로 삼았다. 더욱이 장대나 궁전지 등에서 출토되는 연꽃무늬 와당 등이 5세기 후반 이후로 편년된다는 점에서 환도 산성은 평양 천도 이후에도 계속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환도 산성고구려 도성의 공간 구성과 방어 체계, 나아가 고구려 중후기의 별도(別都)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池內宏, 『通溝』 上(日滿文化協會, 1938)
  • 三品彰英, 「高句麗王都考」(『朝鮮學報』 1, 1951)
  • 李殿福, 「高句麗丸都山城」(『文物』 1982-6, 1982)
  • 魏存成, 「高句麗初中期的都城」(『北方文物』 1985-2, 1985)
  • 차용걸, 「고구려 전기의 도성」(『국사관 논총』 48, 1993)
  • 노태돈, 「고구려의 기원과 국내성 천도」(『한반도와 중국 동북 3성의 역사와 문화』,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丸都山城』(文物出版社, 2004)
  • 여호규, 「고구려 국내천도의 시기와 배경」(『한국 고대사 연구』 3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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