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부민단

한자 扶民團
중문 扶民团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통화시 통화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민족운동 단체
설립자 이상룡 등
설립 시기/일시 1912년
해체 시기/일시 1919년
최초 설립지 길림성 통화
정의

1912년 만주통화현(通化縣)에서 한인의 생활 안정과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결성된 자치 기관.

설립 목적

부민단은 1912년 대흉년으로 해산된 경학사를 뒤이어 이상룡(李相龍) 등이 조직한 단체이다. 부민단(扶民團)이란 부여족의 옛 영토에 그 후손인 한인의 유민이 부흥 결사를 세운다는 뜻이다. 본부는 삼원포에서 조금 떨어진 합니하(蛤呢河)에 두었다. 부민단의 대표자 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 등이 결정되었다.

1. 부민단을 정부의 기능을 가진 보다 넓은 범위를 의미하는 ‘부민회’로 고칠 것.

2. 동포간의 소송사건을 담당할 검찰과 사판제도(査判制度)를 둘 것.

3. 각 지방 교육 기관은 해당 지방의 능력에 맡기고 군사간부 양성기구인 신흥학교의 경비는 일체 본 기관에서 책임질 것.

4. 흉작과 인명손실을 극복하고 조국 광복의 달성에 매진할 것.

변천

결성 당시 부민단의 단장은 허혁(許赫), 부단장은 김동삼(金東三)이었다. 이후 대표자 대회에서 부민회로 명칭을 개편하고 조직 체계를 다시 정비하였다. 중앙의 경우 회장에 이상룡, 부회장에 이탁(李沰), 의사 부장(議事部長)에 김동삼, 재무부장에 안동식(安東植), 학무부장에 양규열(梁圭烈), 검무감(檢務監)에 최명수, 사판장(査判長)에 이진산(李震山), 검독(檢督)에 성인호(成仁浩), 중앙검찰에 김형식남정섭(南正燮) 등을 선임하였다.

지방 조직은 10호(戶), 100호, 1,000호를 기준으로 패(牌)-구(區)-지방으로 나누고, 조직의 지도자로 패장(牌長) 또는 십가장(十家長)-구장 또는 백가장(百家長)-천가장(千家長)을 두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4월에 유하현(柳河)·흥경현(興京)·환인현(桓仁)·통화현·집안현 등지의 한인 지도자들은 남만주 지역의 민족 운동을 지휘할 조직을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부민단은 자치 기관인 한족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부민단은 1919년까지 이주 한인의 자활과 교육 사업에 주력하였다. 특히 신흥학교의 경우 문무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확대 개편되었을 때 신흥학교는 4년제 본과와 6개월 또는 3개월 과정의 속성 별과를 두고 국내외에서 찾아오는 애국 청년들을 교육하였다.

신흥학교는 무관 학교라는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지만, 교과 내용은 군사 교육에 역점을 두고 있어 사실상 무관 학교처럼 운영되었다. 신흥학교는 1919년 3·1 운동 직후까지 약 1천여 명의 학생을 양성하였다. 부민단은 그 밖의 각지에도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에 힘썼다.

의의와 평가

부민단은 남만주 지역 한인 사회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수많은 청년 인재를 육성하여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의 활약에서 보듯이 1920년대 민족 운동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 『한국독립운동사』 3(국사편찬위원회, 1967)
  •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역사비평사, 1988)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