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분류

선민부

한자 鮮民府
중문 鲜民府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통화시 통화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친일단체
설립자 이동성
설립 시기/일시 1928년 10월
해체 시기/일시 1930년 2월
개칭 시기/일시 1929년 2월
최초 설립지 길림성 통화현
주소 변경 이력 통화현 북관외(北關外)
정의

1928년 10월 길림성 통화현에서 통화 조선인회 회장 이동성(李東成)이 조직한 친일 무장 조직.

설립 목적

선민부는 독립운동[인물·단체 등] 탄압과 친일 행위 등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변천

선민부는 1925년 통화현에 세워진 재만 한인들의 상조계와 이듬해 1926년 환인현(桓仁縣)에 설립된 상조계가 바탕이 되었다. 남만주 독립운동 조직인 참의부의 간부였던 김소하(金篠夏)[본명 장기초]·김선풍(金旋風)·김영제(金永濟)·한의제(韓義濟) 등이 통화의 일본 영사관에 투항한 뒤 이동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친일적 성격을 위장하기 위해, 선민부는 1929년 2월 ‘한교 동향회(韓僑同鄕會)’로 개칭하였다. 이후 회장은 이동성이 계속해서 맡고 참의부에서 이탈한 김영제·한의제·김선풍·독고욱(獨孤旭) 등과 이기술(李己述)·고동호(高東浩)·양동료(梁東遼)·김조(金鳥) 등이 주요 임원을 맡았다. 통화·환인·집안(輯安)·관전현(寬甸縣) 등지에 지부를 두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선민부는 한교 동향회로 개칭할 당시 발표한 취의서(趣意書)에 따르면, 독립운동 단체를 ‘폭력단’, 또는 ‘비적(匪賊)’으로 규정하고 중국의 안녕 질서를 파괴하며, 관민으로부터 혐오를 받는 존재라고 매도하였다.

설립 당시에는 통화현 강산(崗山) 이도구(二道溝)에 본부가 있었으나, 나중에 통화현 북관외(北關外)로 옮겼다. 부원 50여 명이 본부에 합숙하며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필요한 경비 대부분을 일본 영사관에서 보조하였다.

선민부[한교 동향회]는 이후 일본 영사관 경찰과 합동으로 독립군의 ‘토벌’에 가담하거나, 중국 지방 관헌의 독립군 탄압에도 가담하는 등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그 결과 참의부·정의부·국민부 대원 7명이 희생되고, 정의부 대원 2명이 검거되는 손실을 입었다.

선민부[한교 동향회]의 폐해가 커지자 정의부·참의부국민부조선 혁명군 등의 독립운동 조직에서는 이들을 소탕하기 위한 일련의 대책을 수립하였다. 특히 1929년 4월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등 3부의 통합 조직으로 성립한 국민부는 한교 동향회를 토벌하기 위해 ‘선민부 토벌 지휘부’를 설치하였다.

국민부 산하의 조선 혁명군도 1929년 11월 하순 통화의 한교 동향회 본부를 타격하기 위해 강옥성(姜玉成)과 장도백(張道白)[일명 장명도(張明道)]을 대장으로 하는 소분대를 파견하여 야간에 기습 공격하였다. 성대한 연회를 개최하고 있던 한교 동향회 본부 건물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참가 인사 다수를 살상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악질 순사로 악명 높던 문영선(文永善)을 사살하는 등 대부분의 간부를 숙청하였다.

그 여파로 1929년 후반기부터 선민부를 탈퇴하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이에 따라 한교 동향회는 남만주 한인 사회에서 급격히 세력이 위축되었다. 그리하여 1930년 2월 9일에는 일본 영사관의 양해를 구한 뒤 허위로 ‘반일 선전문’을 배포하기도 했다. 이후 유명무실해졌다.

의의와 평가

선민부 주도자들은 통화 일본 영사관 등 친일 세력에 협력하여 남만주 통화현 일대의 독립운동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으나, 오히려 독립운동 세력의 반격을 받아 큰 충격을 받고 동포 사회에서 소멸되어갔다.

참고문헌
  • 김학규, 「三十年來韓國革命運動在中國東北」,(『光復』1권 3기(1941년 5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년 영인)
  • 김태국, 『만주 지역 조선인 민회 연구』(국민대박사학위논문, 2002)
  • 장세윤, 『재만 조선혁명당의 민족 해방 운동 연구』(성균관대 박사 학위 논문, 1997)
  • 장세윤,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연구」(『조동걸 선생 정년기념 논총 한국민족운동사연구』, 나남출판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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