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24개돌

한자 渤海 二十四個돌
중문 渤海二十四块石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발해
정의

길림성(吉林省)과 흑룡강성(黑龍江省) 등 여러 지역에 있는 발해 시대의 다락집 유적.

개설

24개돌[二十四塊石] 유적이란 1m 정도 높이의 돌이 1줄에 8개씩 3줄을 이루어 총 24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발해의 24개돌 유적으로 그 소재가 확인된 것은 총 12곳이다.

유적 분포

지역별 분포를 보면 구국(舊國)에서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로 가는 길목 가운데 돈화시(敦化市) 부근에 4개[강동 24개돌·관지 24개돌·해청방 24개돌·요전자 24개돌]가 있고, 이 길과 연결되어 있는 경박호(鏡泊湖) 부근에 2개[경풍 24개돌·만구 24개돌] 등 6개가 있다. 또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에서 상경 용천부로 가는 길목인 가야하[嘎呀河] 연안 왕청현(汪清縣) 백초구진(百草溝鎭) 흥륭촌(興隆村)에 1개[흥륭 24개돌], 두만강 연안 교통 요충지에 2개[마패 24개돌·석건 24개돌], 그리고 함경도동해안 일대에 3개[송평 구역 24개돌·회문리 24개돌·동흥리 24개돌]가 발견되었다.

유적의 용도

24개돌 유적의 용도에 대해서는 대략 일곱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왕족 시신을 잠시 보관하는 장소, 둘째, 신앙과 관련된 제례를 지내는 데 쓴 건물, 셋째,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숭배하던 종교적인 대상물, 넷째, 주요 도로변에 있는 것으로 보아 역참이라는 설, 다섯째, 왕실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건물, 여섯째, 음식을 말리는 건조실, 일곱째, 곡식 창고설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정황에 근거한 추측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12곳의 24개돌 유적을 보면, 네 가지 공통점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주변 경관이 수려한 곳에 위치한다는 점, 둘째, 발해의 주요 교통로 또는 도로변에 위치한다는 점, 셋째, 주변에 발해 시대의 유적들이 집중 분포한다는 점, 넷째, 지면으로부터 약 1m 정도 높이의 주춧돌이 놓여있는 고상식(高床式) 건물 형태를 취하며, 주춧돌 간격이 일반 건물보다 매우 좁다는 점이다.

유적의 용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견이 분분하지만, 위에 제시한 공통점을 고려해 보면 유적은 바닥에서 떠 있는 건물이며, 주춧돌에 기둥을 세우는 일반적인 가구식(架構式) 건물이 아니라 목재를 가로로 뉘어쌓는 귀틀집 형상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2곳 유적의 구조와 크기가 거의 유사한 것으로 보아 공공의 목적을 가진 창고로 보는 편이 유력해 보인다. 지금도 만주 지역에 가면 각 집집마다 바닥에서 떠있는 개인 소유의 곡식 창고가 있다. 고구려마선구 고분(麻線溝 古墳)의 벽화에 등장하는 부경(桴京)이 고구려에 이어 발해로 전달되었고, 이후 지금까지도 이러한 창고 문화가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축적 특징

유적의 평면 형태는 측면:정면 평균 길이가 6.95m:9.28m로 약 1:1.34의 정방형에 가깝다. 발해상경성(上京城)에 남아 있는 도성 유적 가운데 궁전, 사찰 등 중요 건축물의 측면:정면 비율은 1:2 정도의 장방형 평면이다. 발해의 다른 건축 유형과도 차이가 있다. 정방형에 가까워 주거 혹은 상주용 건축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주춧돌 숫자로 칸수를 세어 보면 1줄에 8개씩 3줄의 주춧돌이 있으니 정면 7칸이고 측면 2칸이 되어 비율이 너무 극단적이다. 만일 각 주춧돌에 기둥이 올라가는 구조라면 동자주(童子柱)로 된 누하주(樓下柱) 성격이었을 것이다.

24개돌 유적은 아직까지 전면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2005년 7월 강동 24개돌 유적만이 발굴되었을 뿐이다.

강동 24개돌 유적 구조 형식은 기초를 보면 먼저 각 줄별로 주춧돌이 놓일 자리를 파고 현무암 재질 쇄석과 흙을 혼합하여 0.90m 정도 다져 쌓고, 그 위를 다시 흙으로 0.50m 다진 후 각 줄별로 주춧돌을 세웠다.

주춧돌 재료는 현무암이고 형태는 방형과 유사 원형 등 다양하다. 지상에 노출된 주춧돌 높이는 0.8m 정도지만 현대에 퇴적층이 많이 쌓여 있어 지금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 각 줄별 주춧돌 간 중심 거리는 대부분 1.07∼1.38m를 유지하고 있어 각 주춧돌마다 기둥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목조 건축 구조 방법은 크게 기둥·보·도리로 구성하는 가구식 구조와 나무를 “⋕” 형태로 수평으로 뉘어 쌓는 귀틀집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이렇게 기둥 간격이 좁은 상태에서 건축물을 구성할 수 있는 방법은 귀틀집 형식의 건축물뿐이다. 가구식 구조라면 유적과 같이 좁은 간격으로는 불합리한 구조가 될 것이다.

유적지에는 주춧돌과 주변에 흩어져 있는 약간의 유물들밖에 없기 때문에 바닥 및 벽체가 어떠했을 것인가를 밝혀줄 명확한 증거는 없다. 현 상황에서 바닥 및 벽체 구조를 추정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주춧돌 배열과 주춧돌 형상, 그리고 유적 주변 유물들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주춧돌 윗면에 기둥을 세우기 위한 주좌를 베푼 흔적이 전혀 없을뿐더러 윗면에 기둥을 세웠던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또한 다른 유적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강동 24개돌 유적만은 귀틀재를 걸치기 위한 홈이 주춧돌 윗면에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유적 주변에서 벽체를 구성했을 듯한 건축 재료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지붕 재료인 기왓장은 많은 양이 남아 있음에도 유독 벽체를 구성한 재료만 없다는 것은 벽체를 구성한 재료가 돌 또는 벽돌이 아니라 목재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강동 24개돌 유적은 높은 주춧돌을 세우고 목재로 바닥판을 구성한 다음 목재를 가로로 뉘어 쌓은 귀틀집 벽체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유적 주변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여러 색의 베무늬 기와, 암수키와, 막새기와 조각 등 기와지붕과 관련되는 유물들이다. 출토된 기와는 발해의 도읍이었던 상경성에서 수습된 것과 무늬 및 색채가 동일하다. 규모가 20평 정도로 작지 않은 건물이라는 점과 여러 기와 장식물로 보아 24개돌 유적은 맞배, 우진각, 팔작지붕 등 고급의 기와 지붕이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 이병건, 『발해 24개돌 유적에 대한 건축적 연구』(건국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01)
  • 이병건, 「발굴 결과로 새롭게 본 강동 24개돌 유적의 건축적 성격」(『동북아 역사 논총』 37호, 동북아역사재단,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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