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흠무

한자 大欽茂
중문 大钦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발해
상세정보
성격 인물/왕족·호족
성별
출생 시기/일시 737년
정의

중국 동북 3성 지역 및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고대 국가 발해의 제3대 왕.

개설

대흠무(大欽茂)대무예[무왕]의 아들로 태어나 737년 대무예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발해 제3대 왕으로 즉위한 대흠무는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였고, 774년[대흥 38]에 보력(寶曆)으로 고쳤다가 다시 대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존호는 대흥 보력 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金輪聖法大王)이고, 황후는 효의 황후(孝懿皇后)이다. 대흠무는 57년간 재위하는 동안 문치주의를 표방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가 계

대흠무의 장남인 대굉림(大宏臨)은 보위에 오르지 못하고 문왕보다 먼저 죽었다. 대굉림의 아들은 대화여(大華璵)인데, 제5대 성왕으로 즉위하였다. 둘째 딸인 정혜 공주는 문왕이 왕이 되던 해인 737년에 태어나 777년에 40세의 나이로 죽었다. 1949년 중국길림성 돈화시육정산 고분군 안에서 그녀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문왕의 넷째 딸인 정효 공주는 757년에 태어나 792년인 36세의 나이로 죽었다. 1980년 중국길림성 화룡현용두산에서 그녀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묘지와 함께 벽화도 발견되었다.

활동 사항

대흠무는 737년 즉위 이래 문치주의를 표방하고 발해의 내정과 외교에 집중했다. 특히 그는 왕권강화를 위해 당으로부터 율령을 받아들여 중앙과 지방의 통치제도를 정비했다. 발해의 중앙 및 지방 제도는 건국 직후부터 마련되었지만, 문왕 때에 틀이 대부분 확립되었다. 그리고 불교식으로 지은 ‘대흥 보력 효감 금륜성법대왕’이라는 문왕의 존호 중 ‘금륜(金輪)’과 ‘성법(聖法)’은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 이념에서 유래된 것이다. 문왕은 전륜성왕 이념을 이용해 왕권강화를 도모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주변 말갈 제부(諸部)로의 영역 확장과 지방 세력의 정비 및 관직에 대응되는 관품제도를 정리하여 관료제를 확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혜·정효 공주 묘지명에는 아버지 문왕을 ‘황상(皇上)’으로 표현했다. 황상이란 말은 신하가 황제를 부를 때 사용하는 것이다. 문왕은 즉위 당시부터 대흥, 774년부터 보력, 780년대에 다시 대흥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는 57년간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 주변 국가와의 외교도 활발히 추진한 현명한 군주였다.

첫째, 문왕은 당나라와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문왕은 57년 동안 61회 이상의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했는데, 이러한 활발한 대당관계를 통해 당의 문물제도를 적극 수용하였다. 762년 당나라가 종래 ‘발해군(渤海郡)’이라고 호칭하던 것을 ‘발해국(渤海國)’으로 바꾸고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책봉했다. 이것은 당시 발해의 성세를 인정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당에 ‘안사(安史)의 난(亂)’ 이후 발해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한편 『신당서』 발해전에 ‘신라로 통하는 길[新羅道]’이라고 되어 있는데, 대체로 문왕은 집권 중반에 들면서 신라와의 상설교통로인 신라도를 설치하고 신라와의 평화로운 교섭을 모색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안사의 난으로 당의 대외규제력이 이완됨에 따라 문왕은 신라경덕왕과의 상호 교섭을 이룩할 수 있었다. 764년 당나라 사신이 신라도를 통해 발해에서 신라로 간 적도 있다. 이처럼 대흠무 시기 발해는 신라와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었다.

둘째, 문왕은 재위하는 동안 일본과도 활발히 사신이 내왕하였다. 『속일본기』의 발해 관련 내용에서, 발해 제3대 문왕대흠무가 일본에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 ‘고려국왕(高麗國王) 흠무언(欽武言)’이라고 하였다. 또 일본의 왕실 창고인 정창원(正倉院)에 소장된 「악구 궐실 병 출납장(樂具闕失幷出納帳)」이란 문서에는 762년 일본에 사신을 갔다가 다음에 돌아온 왕신복(王新福) 일행이 763년 1월 동대사(東大寺)를 방문한 흔적을 보이는데, 이 문서에는 ‘고려객인(高麗客人)’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발해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방하였음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오늘날 일본이 발해고구려 계승성을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 깊이 있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문왕은 단순히 나라 이름만 고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고구려 역대 태왕이 그러했던 것처럼 천손(天孫)이라고 했다. 771년 문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을 천손으로 표시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장인과 사위(舅甥)라고 하였다. 그러자 일본에서 이를 항의하기도 했다. 천손이란 의미는 곧 천하의 주인 즉, 제국의 지배자인 천자(天子)라는 뜻이다. 발해가 일본을 화나게 할 정도로 낮추어 보는 문서를 보낸 것은, 발해의 국력이 강해졌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문왕대흠무는 고왕대조영(大祚榮) 이후 30년간 수도였던 지금의 돈화 분지(敦化盆地) 안에 있던 오동성(敷東城) 지역에서 벗어나, 742년 무렵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로 수도를 옮겼다. 중경 현덕부는 현재 길림성 연변자치주 화룡현서고성자성인데, 이 주변은 두만강 하류로 흘러드는 해란하(海蘭河) 유역으로 철과 옷감, 쌀 생산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 다시 755년 무렵 수도를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겼다. 이곳은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진(東京城鎭) 일대다. 문왕이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는 북쪽에 위치한 말갈족 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통치하기 위함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문왕은 785년 무렵 또 다시 수도를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로 옮겼다. 이곳은 해양 교통의 요지로 현재 연변자치주 훈춘현팔련성(八連城) 지역으로 추정된다.

발해에는 이들 3곳의 수도 외에 남경 남해부[함경북도 북청군으로 추정], 서경 압록부[길림성 임강시로 추정]가 더 설치되어 5경 제도를 갖추고 있다. 이 또한 문왕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5경을 통해 문왕발해의 넓은 영역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국토의 균형 발전을 이루려고 했던 듯하다. 문왕은 정효 공주가 죽은 다음해인 793년 죽었다. 존호는 대흥 보력 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金輪聖法大王)이다.

참고문헌
  •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
  • 『속일본기(續日本記)』
  • 한규철, 『발해의 대외 관계사』(신서원, 1995)
  • 동북아역사재단 편, 『발해의 역사와 문화』(동북아역사재단, 2007)
  • 김육불, 『발해국지장편』(신서원, 2008)
  • 김진광, 『발해 문왕대의 지배 세력 연구』(박문사, 2012)
  • 송기호, 「발해 문왕대의 개혁과 사회변동」(『한국고대사연구』6, 서경문화사, 1992)
  • 조이옥, 「발해 문왕대 대신라교섭과 남경」(『동양고전연구』3, 동양고전학회, 1994)
  • 최의광, 「발해 문왕대 대당관계」(『사총』50,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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