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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배 축제를 만들어낸 연변의 대표 과일, 만무 과원의 사과배

한자 沙果배 祝祭를 만들어낸 延邊의 代表 과일, 萬畝 果園의 沙果배
중문 首创苹果梨节的延边的特产苹果——万亩果园的苹果梨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시대 현대/현대
사과배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달콤새콤한 과일의 고장, 연변!

중국 동북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연변(延邊)은 사과와 사과배 등, 과수 농사로 잘 알려진 곳이다. 특히 사과배는 연변의 명물로 지역민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과일이기도 하다. 조롱박 모양의 사과배는 생긴 모양만큼이나 맛도 당도도 좋다. 그러나 처음부터 연변이 사과배로 유명했던 것은 아니다. 사과배는 철저하게 ‘가지 접붙이기’라는 농업 기술을 통해 한 농사꾼의 끈질긴 노력과 정성으로 만들어 낸 창작품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가정이 무의미 하지만 최창호(崔昌虎)[1897~1967]가 없었다면 사과배 또한 탄생되지도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특히나 과일 나무나 벼와 같은 식물은 기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더욱 그렇다. 연변 사과배의 영웅 조선족 최창호의 이야기는 러시아 극동에서 벼 재배법과 기술을 보급, 확산시키는 데 선구자의 역할을 했던 신우경의 이야기만큼이나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감동과 흥미를 제공하고 있다.

타 지역에 비해 연변은 과일 생산에 유리한 독특한 기후, 토양, 수리 등의 특점을 갖고 있다. 특히 동위도(同緯度) 지대에 비해 겨울이 따뜻하고 여름은 서늘하며, 과일 성장기의 기온 일교차가 큰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 또한 북한, 러시아, 한국, 일본과도 접하고 있어 과일의 판로에도 유리한 여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연변에서만 볼 수 있는 과일이 있고, 과일의 맛 또한 월등히 좋다. 예로부터 연변에서는 여러 가지 우수한 품종의 과일을 생산해 왔고, 이에 중국 정부에서도 연변의 자연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여 과일 생산을 연변 농업 경제의 주요 부문으로 간주하고 대단위의 과수 농업 발전에 투자를 해왔다. 그 중에서 사과배는 연변의 주력 과수 상품이자 명물로 자리를 잡았다.

사과배는 조선족 농경 문화의 축소판이자 조선족이 중국 땅에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사과배 뿐만 아니라 이동원의 실험과 개척 정신에 힘입어 1950~1960년대부터는 사과 과수업도 연변 농업 생산에 큰 힘을 보태고 있고, 그 외에도 앵두, 포도와 같은 작물들도 재배 및 생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주인공, 연변의 명물, 사과배는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을까?

북청의 배접 가지와 연변의 돌배나무가 만나다!

연변의 사과배는 1921년에 연길현 노두구진(老頭溝鎭) 소기촌(小箕村)의 최창호에 의해서 세상에 나왔다. 소기촌은 원래 함경북도 경성 출신의 최창호 일가에 의해 개척된 곳이다. 최창호는 함경북도 경성군 주남면 용전리(咸鏡北道 鏡城郡 朱南面 龍田里) 출신으로, 1909년에 아버지 최병일(崔秉義)을 따라 안도현(安圖縣) 내두산(內頭山)에 이주했다.

7년 후 최창호는 현재의 용정시(龍井市) 도원향(桃源鄕) 소기촌으로 옮겨왔고, 그곳에서 마지막까지 살았다. 소기는 중화민국 정부가 마을명을 한문으로 등기할 때 지어진 것으로 원래의 지명은 ‘작은 버치골’이다. 노두구진에서 부르하통하를 건너 10여 리 뻗어나간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형이 마치 버치[버찌]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처음에 최창호 일가가 소기촌에 이주해 왔을 때만해도 그곳은 인가 하나도 없는 무인 지대의 숲이었다. 정착 후 최창호의 가족은 러시아강동(江東)에 가서 번 돈으로 10㏊의 땅을 사서 밭을 개간하였다. 이어 집을 짓고 거처를 안정시킨 후 살구, 오얏, 복숭아, 앵두 등의 과수 농사를 시작했다. 그러던 1921년 어느 날, 최창호의 부탁을 받은 동생 최범두(崔凡斗)가 함경남도 북청에서 우수한 품종의 배나무 가지 6대를 가지고 들어왔다.

최창호는 그 배나무 가지들을 정성스럽게 텃밭에서 자라난 2~3년생 돌배나무 가지에 접목을 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기후였다. 연변 지역이 타지역에 비해 농작물 재배에 좋은 기후 조건을 갖고 있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존의 작물들에 국한된 것일 뿐, 새로운 작물의 생존 조건에는 부합되지 않았다. 과수 나무나 농사는 특히나 기후에 민감하기 때문이었다. 필자의 과수원도 한반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나쁘지 않은 기후 조건 속에 있었지만 과일 표면의 착색과 관련한 작황면에 있어서는 적지 않게 기후의 영향을 받는 것을 보아왔다. 이는 과일의 상품성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 만큼 중대 사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북청에서 가져온 배나무 가지와 돌배나무 가지와의 접목이 있었던 첫해에 최창호는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첫해에 배나무 가지 세 대가 냉해를 입어 말라죽었지만 나머지 세 대는 살아남았던 것이다. 이후 살아남은 세 대는 3년의 적응기를 거치며 냉해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적응 능력을 갖게 되었다. 1927년 5월 초, 마침내 살아남은 세 그루 배나무에서 흰 배꽃이 폈고 열매가 열렸다. 하지만 그 당시의 사과배는 내한성이 낮아 평균 기온이 4℃밖에 되지 않는 안도 내사구와 돈화에서는 자라지 못했다.

이에 최창호는 계속해서 내한성이 높은 사과배 품종 개량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최창호에 의해 내한성이 강하고 당도가 높은 사과배 신품종이 개발되었다. 이후 사과배는 인근의 농민들인 김상욱, 김춘부 등에 의해 멀리 용정, 화룡 서성, 도문까지 확산되어 나갔고, 연변 각지에 명성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연변 과수업의 또 다른 영웅들, 이동원과 최일선

최창호의 사과배는 연변 조선족 사회의 이주 개척사에서 성공적인 사례이자 자랑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여기에 사과배 이외에도 여러 농업 작물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이동원의 사과와 최일선의 앵두 등의 작물들이 있는데, 사과 재배의 성공을 이룬 이동원의 이야기에서 또 하나의 진한 감동을 맛보고 가도록 하자.

한반도 북으로 올라 갈수록 차가운 기후로 인해 과수 작물의 경우, 정상적인 재배를 하기가 어렵다. 가령 북위 42° 이상에서 사과 재배는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동원은 함경북도 길주 사람으로 1930년대 용정시 삼합진(三合鎭) 대소(大蘇)에서 살았는데, 대소는 함경북도 무산군(茂山郡)과 회령군(會寧郡) 중간쯤의 두만강가에 위치하고 있다. 길주와 직선거리로 많이 떨어져 있고 기후 차이가 심하게 나서 예로부터 어른들이 사과 재배는 엄두도 내지 말라고 하던 차였다. 그나마 그의 집은 서북 방향으로 산을 등지고 동남향으로 두만강을 마주보고 있고, 집뒤의 산등성이가 자연스레 바람막이가 되어주어서 집 앞 들판은 양지가 바르고 바람이 적은 것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었다.

하지만 이동원은 그 불가능을 가능한 현실로 만들어 내며 최창호의 사과배에 이어 또 하나의 과수 명물을 탄생시켜 놓았다. 이동원은 승산이 있다고 보고 집앞 양지바른 자갈밭을 과수원으로 만들기 위해 매일같이 집안 식구들을 동원해서 돌을 주워 내었다. 그러던 1935년 봄에 이동원은 고향인 길주(吉州)에 가서 일본에서 들여왔다는 사과나무 묘목 100여 그루를 사가지고 들어와 자갈을 골라 낸 밭에 옮겨 심었다.

이동원은 가뭄 때에는 두만강 물을 길어다 과수원에 뿌렸고, 겨울철에는 냉해를 받지 않도록 묘목에 보온을 해주며 갖은 정성을 다 들였다. 그로부터 3~4년 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잘 자란 사과나무에서 첫 열매가 맺었고 그 해에 결실까지 보게 되었다. 이동원의 정성과 노력이 대소의 기후에 맞는 내한성 있는 사과나무 육성과 재배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토지 개혁이 시작되자 이동원은 지주로 몰리게 되었다. 이에 이동원은 토호 청산을 피해 땀이 깃든 사과 과수원을 등지고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과수원은 대소촌 정부의 집단 소유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촌 정부에서 본래 주인 못지않게 과수원을 잘 가꾸어 나갔다.

1964년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초대 주장 주덕해(朱德海)대소 방문은 대소의 사과가 주변 지역으로 더 알려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방문 길에 대소의 탐스런 사과로 융성한 대접을 받은 주덕해는 이후 대소의 사과 과수업을 발전시키기로 결심하고, 요령성(遼寧省) 개현(蓋縣)에서 초빙해 온 과수 전문가 관치성[만족]을 대소에 파견하여 과수 단지를 조성하도록 하였다.

1990년에 이르러 대소의 과수는 16만 7000여 그루까지 증가했고 품종도 30여 종이나 되었다. 비록 대소만무 과원의 선구자 이동원은 떠나갔지만 그의 개척 정신은 조선족 사회의 귀감으로 남아 있고, 대소를 최창호의 사과배와 더불어 연변 지역 최고의 사과 과수원 단지로 만드는 데 귀중한 원천이 되었다.

조선족 농업 개척사의 상징, 연변의 명물로 우뚝 선 사과배!

사과배는 1920년대 최창호의 끈질긴 시험 재배 끝에 세상에 나왔다. 이후 사과배는 계속된 품종 개량을 거쳐 연변의 기후에 맞는 품종으로 재탄생되었다. 신품종 사과배가 연변의 명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나갈 수 있게 된 것은 1950년대 들어서 부터이다. 여기에는 1950년대 연변 농업 관련 연구소와 학자들의 관심과 지원이 컸다.

1950년 봄에 연변 동북 농학원 교수 주음과 길림성 농업 과학 연구소의 고모, 장가책, 길림성 농업 학교의 축경림, 연변 농업처의 형자연, 이창복, 이순재, 연변 세린하 과일 시범 농장의 조환순, 유순례로 구성된 길림성 과일 품종, 연변 지역 과일 품종 조사조는 소기촌에 내려와 공식적으로 사과배에 대한 다양한 조사 사업을 수행했다. 이들 연구 및 조사팀의 활동과 지원은 연변 사과배의 우량 품종을 유지하고, 재배 면적을 확대시켜 나가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연변 각지의 여러 조사팀이 소기촌에 내려와 조사 사업을 수행하던 때까지만 해도 인근 농민들은 사과배를 ‘참배’, ‘청배’, ‘큰배’, ‘사과배’ 등의 여러 명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당시 조사팀은 공식적으로 이를 ‘사과배’로 명명하고, 소기촌의 세 그루 모수를 ‘사과배 모수’로 결정했다. 아울러 조사 작업을 통해 사과배는 내한성과 적응성이 강하고 수명이 길고 수확고가 높으며, 또 과일이 크고 씨가 작으며, 당도가 높고 육질이 두꺼워 6개월 이상 저장이 가능한 우량 품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조사팀은 중앙 부서에 사과배를 우량 품종으로 추천했고, 중앙 부서는 사과배를 전국 지방 우량 품종으로 비준했다. 최창호의 실험 정신과 개척 정신이 빛을 발해 사과배가 정식으로 연변의 특산물로 인정을 받은 순간이다. 이어 1951년에 길림성 정부와 연변 전원 공서에서는 연변을 과일 생산 기지로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나아가 길림성 농업 과학 연구소고모의 책임 하에 길림성 사과배 재배 기술 연구소를 조직하여 소기촌을 거점으로 사과배 재배 이론과 기술 개발을 수행해 나갔고, 이를 통해 연변의 사과배 과수 농업의 발전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고모는 자신이 집필한 저서 『동북의 배』에서 사과배의 내력과 특성, 재배 기술을 계통적으로 소개했다. 이는 사과배에 대해 기술한 최초의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품종 개발로 세상에 나온 지 반 세기가 지난 1980년대에 이르러 사과배는 길림성은 물론 중국의 20개 성과 북한, 러시아, 불가리아 등의 나라에까지 명성이 전파되었다. 특히 내몽고(內蒙古), 청해(靑海), 감숙(甘肅), 요령 등의 지역에서는 사과배가 주요 과일 품종으로 각광받고 있다.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현재 이들 지역의 사과배 재배 면적은 6만 ㏊에 이른다고 한다.

조선족 최창호에 의해 개발된 사과배는 중국 전역에서 공식적으로 그 품질을 인정받았다. 아울러 최창호의 실험 정신과 농업적 능력 또한 중국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사과배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은 사과배가 강한 내한성과 저장성, 그리고 우량의 품질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6년에 열린 전국 배나무 과학 연구 협조 회의에서 전국 성, 시, 자치주에서 온 전문가들은 사과배의 품질을 쿠얼러 향리[고이륵 향리, 庫爾勒香梨], 금풍리(錦豊梨)와 같은 최고의 품질로 평가를 내렸다. 이어 사과배는 1985년 전국 농작물 우량 품종 평의회의 배 평의에서도 1위를 차지했고, 이후 설배, 래양배와 더불어 중국의 3대 명표배[명품배]로 인정을 받았다.

한편 1987년에 농목축 어업부는 용정현을 ‘사과배 고향’으로 명명한 후 전국의 유일한 양질 사과배 생산 기지로 지정했고, 화룡시는 길림성 생산 기지가 되었다. 또 1989년에는 해란강표 사과배가 농업부의 명표 과일이 되었고, 1990년에는 사과배가 녹색 식품으로 등록되었다. 또한 2002년에는 국가 기술 질량 감독 총국의 심사를 거쳐 용정시가 사과배의 국가 원산지 보호 산품지로 최종 등록되었다. 명실상부하게 최창호의 사과배가 연변을 넘어 중국 전역에서도 명품 과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연변과 극동에서 계속되는 한민족 이주 개척의 신화들

사과배의 영웅 최창호의 이야기는 한민족 이주 개척사라는 관점에서 극동 연해주의 벼 재배 영웅 신우경의 사례와 너무도 흡사하다. 그 또한 1910년대 극동 연해주에서 북해도 볍씨를 들여와 극동의 기후에 적응력이 강한 볍씨를 개발해 러시아 땅에 최초로 보급한 벼 재배 영웅이다. 고려인들은 러시아 이주 개척사에서 자타의 공인을 받아온 민족으로, 러시아인들은

“고려인들은 타고난 농사꾼들로 농사가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서도 채소밭을 일구고 귀리와 수수를 재배하는 묘기를 부린다. 돌로 덮인 곳이나 산비탈, 늪지대, 심지어 타이가 등지에서도 고려인들의 손을 거치면 황무지도 옥토로 변한다.”라며 칭찬하기도 했다.

신우경에 의해서 연해주 땅에 벼 재배의 길이 열린 것처럼, 최창호에 의해서 연변에 새로운 품종인 사과배가 보급되어 나갔으니 명실공히 조선인 이주 개척의 성공적인 사례라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최창호는 연변에 사과나무 이식에 성공한 이동원, 조선의 앵두를 연변의 토종 앵두와 교접하여 신품종 앵두를 생산해 낸 ‘연변의 미추린[구소련의 과수 원예가] ’최일선처럼 칭송받는 조선족의 농업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최창호의 실험 정신과 개척 정신은 조선족 이주 개척사의 자랑이며, 사과배는 이주 개척사의 상징이자 조선족 문화의 형상화된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지 접붙이기 이야기

4월이면 사과, 배, 복숭아 등 온갖 과일 나무가 흐드러지게 꽃을 피운다. 도심 속에서 벚꽃 구경을 하는 것만큼이나 과수원에 피어있는 다양한 과실나무의 만개한 꽃들을 보고 있노라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어디 그뿐이랴! 가을에 아직 수확하지 않은 탐스럽게 울긋불긋 익어가는 사과나 배 과수원 사이를 걷는 기분이란 마치 천국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최고의 기쁨을 선사해 준다. 벚꽃놀이가 삶에 찌든 도시민들에게 잠시의 여유를 가져다주는 활력소가 된다면 시골 과수원의 봄꽃과 가을의 열매는 한 해 농사에 목을 매고 있는 농부들에게 있어서 신의 축복의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시골집 과수원 한 켠에는 지금도 소위 말하는 ‘개복숭아’ 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그런데 해마다 봄이면 이 나무의 한쪽 부위에서는 정상적인 우수 품종의 복숭아꽃이 피고, 다른 한쪽에서는 매실꽃이 피고 있다. 이 ‘재미있는’ 복숭아나무는 필자가 대학 시절에 주변의 복숭아 과수원에서 우수 품종의 복숭아나무와 매실나무 가지를 구해다가 실험삼아 장난삼아 해본 ‘가지 접붙이기’가 성공해서 탄생된 결과물이다. 조선족 최창호에 의해 탄생된 사과배도 그와 같은 과정 속에서 탄생되지 않았을까? 어깨 너머 3년이라는 말이 나에게도 현실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꽃 피는 4월 봄이면 이 나무는 신기하게도 분홍색 복숭아 꽃잎과 새하얀 매실 꽃잎을 동시에 한 나무에서 꽃피우고, 꽃이 진 그 자리에서는 튼실한 복숭아와 매실 열매를 맺는다.

사실 복숭아나무와 매실나무는 서로 간에 접붙이기가 가능한 과목들에 속한다. 그래서 그런 ‘한 몸체 두 종류의 나무’의 존재가 그렇게 신기한 것도 기상천외한 것도 아니다. 단지 그러한 원리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는 신기하게 비춰질 뿐이다. 하지만 필자가 아는 바로 사과나무와 배나무는 서로 간에 접붙이기가 불가능하다. 혹 과목을 뛰어넘는 새로운 접붙이기 기술 개발이 이루어졌다면 모르겠지만. 연변의 명물, 사과배도 이러한 가지 접붙이기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연변의 사과배나무는 최창호의 호기심과 농사꾼으로서의 끈질긴 실험 정신이 살아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참고문헌
  • 박보리스, 부가이 니콜라이 저, 김광한, 이백용 옮김, 『러시아에서의 140년간』(시대 정신, 2004)
  • 류연산, 『류연산의 인물 전기, 이동원, 최일선, 최창호』(「말」9월호, 2006)
  • 방종혁, 『연변 농업 과학 기술 발전사』(연변인민출판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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