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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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간도에서 한글과 중국어로 간행된 민중의 목소리 『민성보』

한자 1920年代 間島에서 한글과 中國語로 刊行된 民衆의 목소리 『民聲報』
영문 Min Sung Bo, the newspaper published in both Korean and Chinese in Gando in 1920s
중문 1920年代在间岛用汉语和朝鲜语出版的报纸民声报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민중의 목소리 『민성보』의 탄생

『민성보』는 1928년 1월 연길현 용정에서 당시 연길현·혼춘현·화룡현·왕청현 등의 연변 지역 교육계와 공상계 상류층 인사들이 공동 출자하는 형식으로 창간된 신문이다. 『민성보』는 1920년대 간도 용정에서 간행된 대표적인 진보 신문의 하나였다.

중국어와 한국어로 간행된 『민성보』는 “언론을 빌어 동포를 깨우친다.”는 취지로 창간된 이래 언론을 통한 활발한 항일 구국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2년 초 중견 편집진들이 일제에 체포되면서 부득이하게 폐간되었다.

『민성보』는 연변 지역 한인 사회를 대상으로 이 시기 활약하였던 한인 사회 단체의 활동, 사상과 이념 문제, 향토 역사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래는 이를 알 수 있는 한인 사회에 관련한 기사 목록이다.

「연변 시사 만평(중)(延邊時事漫評(中))」[民國 17.05.05], 「동만운동의 종횡관(팔):방화산(東滿運動의 縱橫觀(八):方火山)」[民國 17.05.27], 「혁신단 사건 발생지 용암동 실사기(革新團事件發生地龍岩洞實查記)」[民國 17.06.03; 17.06.10; 17.06.14; 17.06.21; 17.06.29], 「집회일속(集會一束)」[民國 17.06.21], 「레닌주의에 대한 민족 문제 개요(6)(레닌主義 對한 民族問題概要(六))」(民國 17.06.10), 「일본 제국주의 재동북지전도(속)(日本帝國主義在東北之前途(續))」[民國 17.10.07], 「논한민공당지기인급중일아국제지관계:천수(論韓民共黨之起因及中日俄國際之關係:天水)」[民國 19.09.18], 「화룡현 조사지(1):박창한(和龍縣調查志(一):朴昌翰)」[民國 19.09.06].

『민성보』가 탄생하기까지

『민성보』는 일본 제국주의가 연변에 대하여 정치·경제·문화·군사적으로 전반적인 침략을 감행하던 시기에 탄생했다. 일제는 1907년 8월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세웠고, 1909년에는 청나라 정부와 간도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일제는 용정·국자가 등지를 일본인에게 거주와 무역을 허용하는 상부지(商埠地)로 만든 동시에 길회(길림-회령) 철도 부설권과 한인 영사 재판권을 얻었다. 또한 그들은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철수하는 대신에 간도 일본 총영사관을 설립한 후 연길·화룡·혼춘·왕청·안도현 등을 관할하였다.

일제는 용정의 민족 교육을 말살하기 위해 1906년 개교 1년 만에 폐교된 서전 서숙의 교사(校舍)를 매입하여 1908년 한인 자녀를 상대로 만주 경내에서 처음으로 식민주의 교육의 거점인 간도 보통학교를 설립했다.

1921년 7월에는 중국 동북 지역 침략의 중요한 발판 가운데 하나였던 연길현 용정에서 『간도 신보(間島新報)』를 창간하였다. 창간 당시 『간도 신보』는 일본어판과 한글판 두 가지가 발행되었다. 『간도 신보』에는 일본 거류민회의 내용뿐만 아니라 연변 지역 한인 사회와 관련한 정치·경제·문화·사회 전반에 관한 내용, 조선 총독부 관리들이 연변 지역을 방문한 내용, 소련연해주 지역 한인 사회와 관련한 내용 등이 실렸다.

1927년 7월, 일제는 일본 상인들을 선동하여 중국 정부가 부과하는 수입 물자에 대한 부가세 납부를 반대하고, 중국 해관 창고 문을 부수고 공공연히 물품을 약탈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의 법령을 무시한 불법적 행위는 연길 도윤(延吉道尹)과 각 현 인민들의 지대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각 현의 인민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시위 행진을 전개하며, “길회 철도 부설을 반대한다!”, “연변에서의 일제의 각종 특권을 취소하라!”, “관세 자주를 쟁취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일본 측에 강력히 항의했다. 결국 일본 측은 일본 상인들로 하여금 잘못을 승인하고 사과하게 하며, 세금을 보충하여 납부하고 일체 손실을 배상하도록 하였다.

그 뒤 연변의 애국적 진보 인사들은 자발적으로 민중을 각성시켜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주권을 수호하며 정의를 주장하고 압박과 착취에 반항하기 위하여 『민성보』의 창간을 준비했다.

『민성보』는 1927년 여름, 연길·화룡 2개 현의 저명인사들인 화룡현 교육국 국장 관준언(關俊彥), 용정촌 전화국 국장 방지함(方芷涵) 등이 발의하고, 연길·혼춘·화룡·왕청, 용정촌의 교육계·공상계의 애국 인사들이 마음을 합쳐 성금을 모금하여 인쇄기를 구입한 후 용정촌 신안 거리[지금의 민성 거리]에 신문사를 꾸림으로써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민성보』의 조직과 편집 방향

민성보사의 최고 집행 기구는 4개 현과 용정촌에서 선출된 40여 명의 보무 위원회(報務委員會)였다. 그리고 신문사 내의 조직기구로는 사장과 경리를 두고 그 아래에 편집부·영업부·인쇄소를 두었다. 『민성보』의 중국어면 총편집은 안회음이 맡았다. 그는 국내외 주요 신문 편집을 책임지고 주관하였다. 안회음은 국민당의 중간파 인물로써 신문사내의 진보 세력들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게 되자 얼마 후 사퇴하고 1928년 여름에 용정을 떠나 천진으로 돌아갔다. 『민성보』의 지방 신문과 문예면은 주동교가 주관하였다. 중국어면 편집에는 손좌민이, 교정은 이별천이 맡았다. 한국어면 총편집은 윤화수(尹和洙)였다. 민성보사에는 60여 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조선족과 한족이 각기 절반씩을 차지하였다.

『민성보』는 매주 6회 발행했는데, 총 4면으로 1면부터 3면 전반부까지는 중국어면이고, 3면 후반부터 4면은 한국어면이었다. 당시 『민성보』의 주요 영업 수입은 광고비였다. 4면 중의 한 면은 광고가 차지했다. 『민성보』의 하루 발행량은 2,000부 정도로 비록 발행량이 많지는 않았으나 영향력은 매우 컸다. 특히 한인 주민들에게 그 영향이 컸는데, 『민성보』의 출간으로 일본인 신문 『간도 신보』가 독점했던 용정촌 여론의 동향이 변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민성보』는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막고 안으로는 봉건 세력을 공격하는 것에 편집 방향을 맞추었다. 『민성보』는 투쟁의 예봉을 직접 일본 제국주의와 중국 통치 계급에게 돌리고 압박을 당하고 있는 민중에게 각성과 단합을 촉구하면서, 민족 평등을 주장하고 문화와 인종이 같은 중국인과 한인들에게 환난을 함께 이겨나갈 것을 호소했다. 『민성보』는 한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출병한 일제의 야만적 행위를 적발 및 폭로했고, 일제가 설치한 경찰 조직, 경제계와 문화계 등에서 활동하는 간첩[특무] 활동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며 규탄했다.

한편, 『민성보』가 탄생되던 시기를 전후하여 지방의 중소 민족 공상업은 이미 생기를 띄고 있었다. 용정 한 곳만 하더라도 사영 발전소·제분소·양조소·사탕 공장·제재 공장, 벌목 회사·은행 등이 연이어 세워졌다. 그러나 당시 값싼 일본 상품과 박리다매를 추구하는 일본 담배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민족 공상업은 더이상 발전할 수 없었다. 이에 『민성보』는 "외국 상품을 배척하고 이권을 만회하자!", "관세 장벽을 높이 쌓자!"라고 강력히 설파함과 동시에 세금을 감면 혹은 면제받을 수 있는 좋은 방법들을 건의 제출했다. 그러나 지방 관원들이 자기 이익만 채우고 관세권을 무시하는 바람에 결국 이권이 외국인의 수중에 들어가 버려 그 어떤 방안을 제시해도 무용지물이 될 뿐이었다. 『민성보』는 이러한 암울한 현실을 만화로 묘사했다. 만화의 내용은 닭[중국 상품] 한 마리가 노끈[세금]에 얽매여 있는데 독수리[외국 상품]가 덮쳐들어 닭의 깃털을 쪼아 닭이 죽어가는 형상이었다.

『민성보』가 교육, 문화 생활에 끼친 영향

교육 방면에 있어서 『민성보』는 새로운 학제를 도입할 것과 백화문을 쓸 것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연변 지역은 한문(漢文)이라고 불리는 문언문(文言文)을 쓰던 것에서 현대 한어(現代漢語)인 백화문(白話文)을 쓰게 되었고, 지방 정부의 공문, 포고문마저 차츰 백화문으로 쓰게 되었다. 한인에 대해서는 형식에 구애되지 말고 스스로 학교를 꾸릴 것을 제시함으로써 한인이 꾸린 학교가 일본 사람이 꾸린 소학교나 영국, 독일 사람들이 꾸린 교회 학교보다 훨씬 많아지게 되었다. 동시에 신문화·신사상을 전파하기 위하여 『민성보』는 문예, 노동자 원지, 여성, 아동 등 전문란을 설치하여 새로운 격조로 대량의 새로운 작품을 발표했으며, 농업 집단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러시아 농촌을 소개하고 「들끓는 새 로씨야 농촌」, 「철의 흐름」 등 새로운 러시아 작품을 전재하였다. 연변 문단이 활기를 띤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민성보』는 또한 문화 생활면에서도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1930년 봄, 수구파인 장창일과 주광일 등은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제창하고 ‘이풍이속(移風移俗)’을 반대한 반면 화룡현 삼도구 제6 소학교 교장 주소성 등은 공가점(孔家店)을 타도하고 낡은 예교를 반대하며 신문화를 받아 들이고 백화문을 사용할 것을 주창했다. 이들은 『민성보』를 통해 3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논쟁하였는데, 이는 결국 존공파(尊孔派)의 실패로 끝났다. 이 3개월의 필전(筆戰)은 여성들의 단발부터 남녀 합교(男女合敎), 남녀 동학(男女同學), 혼인 자유, 남녀 평등과 여성 참정 등의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켰고 잠잠하던 연변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처럼 『민성보』는 한 자루의 비수가 되어 일제와 낡은 통치 계급을 위협했고, 이들은 『민성보』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면서도 두려워하였다. 일제는 한국어면 총편집자인 윤화수를 위협하며 압박했지만 윤화수는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나갔다.

『민성보』, 역사가 되다

1924년에 시작된 제1차 국공 합작은 1927년 마무리되었고, 『민성보』의 간행에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1929년 1월 손좌민·이별천 등 신문사 내의 공산당원들이 용정을 떠났고, 1930년 말에 이르러서는 『민성보』의 주요 편집진이 공산당원에서 국민당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항일이라는 대의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1930년 말 국민당 우파의 원로인 호한민(胡漢民)이 ‘민성보’라고 신문의 제호를 친필로 쓴 뒤부터 『민성보』는 우파적인 성향을 담기 시작했다. 특히 문예 전문란의 좌파적인 성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민성보』의 창간 주역인 방지함은 직접 편집을 맡고 의연히 일제를 비판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 사변’으로 불리는 ‘9·18 사변’-유조호(柳條湖)만주 철도 폭발 사건-의 발발로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중국 침략을 위한 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고 식민지화하기 시작하자 『민성보』는 마침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제가 『민성보』의 주요 지도자들을 갖은 수단을 동원해 탄압했고, 외교에 무능했던 지방의 중화민국 관리들은 끝내 신문사를 보호하지 못했던 것이다.

『민성보』는 곧 '나라를 위해 몸 바친 투사'라고 할 만하다. 다음의 글은 『민성보』의 창간인이자 사장인 관준언이 서명했던 비장한 정간사이다.

"동인들은 엎어진 둥지에 성한 알이 없음을 번연히 알면서도 원쑤들의 온갖 위협과 유인을 물리치면서 몇 달 동안 출판을 견지해왔다. 꺾어질지언정 휘여 들지 않으려는 의지로써 원쑤를 섬기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참고문헌
  • 전광하·박용일, 『세월속의 용정』(연변인민출판사, 2002)
  • 오육삼, 「진보적 신문 『민성보』」(『연변문사자료휘집1』, 정협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원회 문사 자료 위원회 편, 연변인민출판사, 2007)
  • 박금해, 「1900년대 초~1920년대 日帝의 在滿 朝鮮人 교육 정책 연구」(『사학연구』, 제99호, 2010)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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