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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테마파크 백년부락으로 변신한 두만강변백룡촌의 고택

한자 農村 테마 파크 百年 部落으로 變身한 頭滿江邊 白龍村의 古宅
중문 图们江畔白龙村古宅成为农村主题公园--“百年部落”
분야 생활·민속/생활|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월청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유적|건물|가옥
재질 목조
용도 거주
주거용 가옥 길림성 도문시 월청진 백룡촌
호랑이를 이기는 마을, 백룡촌

백룡촌(白龍村)은 도문시(圖們市) 월청진(月晴鎮)에서 9.5㎞ 떨어진 두만강변에 위치해 있으며 광서(光緖) 초년에 생겨났다. 백룡촌의 총 면적은 35.35㎢, 삼림 면적은 25.30㎢, 경작지 면적은 142㏊[1.42㎢]이다. 동쪽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국경을 접하고, 서쪽과 남쪽은 용정시와, 북쪽으로는 석건촌(石建村)에 인접한다. 2000년까지 마을에는 3개의 자연둔(自然屯)과 150호 446명의 조선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부분은 외국이나 대도시로 이주해 나간 상태이다.

이곳이 백룡촌이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옛날 백룡촌에서는 산에서 내려온 호랑이가 늘 마을을 습격하여 사람들을 해치곤 했다. 이 때문에 마을의 노인들이 함께 모여 방법을 모색한 후, 범을 내쫓는 포서판(布瑞板)을 세웠는데, 이 과정에서 호랑이를 이길 수 있는 동물은 백룡(白龍)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백룡이라고 지었다고 전해진다.

테마파크로 변신한 백년 고택

백룡촌의 마을 입구에는 100여 년 되는 고택이 있다. 이 고택은 박여근(樸如根)이라는 조선 이민 상인이 지은 집이라고 한다. 1890년에 시작하여 1893년 9월에 준공되었다고 하니 근 3년 동안 지은 집이다. 집은 주로 토목과 기와 구조로 못하나 박지 않고, 원시적인 대패와 도끼 등의 공구로 지었다고 한다. 이용된 나무는 백두산에서 얻은 질 좋은 목재이고 기와는 조선에서 배로 운송된 것이다.

도문시 박물관에서 기재한 내용에 따르면 ‘고택’의 주인은 이집에서 50여 년을 살았는데 식구는 모두 5명이었다고 한다. 슬하에는 아들 3명과 딸 1명이 있었는데, 아들은 쌍둥이였고 딸은 뒤뜰 안에 거주하였다. 그 중 아들 한 명은 칼을 찬 관리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 집주인이 일본으로 이사를 가 한동안 빈 집으로 남아 있었던 것을 토지 개혁 시기[1946~1948]에 정부가 촌민에게 집을 분배하였다고 한다.

신 농촌 건설의 시점촌(試點村)으로 지정된 백룡촌의 김경남(金京男)씨는 2009년부터 마을 입구에 있는 131년 역사를 가진 고택을 중심으로 13채의 각기 다른 조선족 풍격을 살린 건축물을 복구하여 조선족 백년 고택을 테마로 한 ‘테마파크’촌을 시공하였다.

백년 고택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이 샘이 깊은 두레박 우물이다. 우물가 주위에는 수양버들이 머리를 풀고 바람에 하느작거린다. 마당 북쪽에는 물레방아가 무슨 시름이 그리 깊은지 삐거덕삐거덕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데 적막한 마을에 생기를 더해주는 듯하다. 고택의 바깥벽에는 녹슬지 않은 호미며 낫 등 때 묻은 농기구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다.

시원히 열어 제친 문으로는 제비들이 마음껏 날아들어 집안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제비도 앉고 싶은데 가 머문다’는 속담처럼 제비들도 백년 고택이 마음에 드는가 보다. 집안을 들여다 보면 구들에는 옛날 까래가 깔려 있고 집안은 굵직한 나무 기둥과 흙벽이 둘러싸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가 신을 벗고 바닥에서 기둥을 바라보면 사진 한 장이 걸려있는데, 그 사진은 바로 집을 수리할 당시 기둥에서 발견된 백년 고택의 초석사진이었다.

2010년 9월 16일, 도문시에서는 백룡촌에 ‘중국 조선족 백년부락(中國 朝鮮族 百年部落)’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이때부터 백년부락은 민속 음식, 농경 생활, 민속 표현과 오락이 함께하는 전통적 ‘농가락(農家樂)’[밥은 농가에서 먹고, 잠은 농가에서 자고, 놀 거리는 농가경이고, 즐기는 것은 농가의 락이다.(吃農家飯, 住農家屋, 游農家景, 享農家樂)] 관광구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제비가 먼저 알아본 풍수 좋은 집

“백년부락”의 주인장 김경남은 올해 61세이다. 김경남은 10여 년 간의 해외 노무 생활을 마치고 8년 전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외에서 벌어온 돈을 어디에 어떻게 가치있게 쓸 것인가를 궁리하던 중 셋째 동생 김경택(金京澤)이 고향 마을에 사놓은 옛 기와집이 눈에 들어왔다. 홍송 원목(紅松原木)을 재료로 쓸까 싶어 3,000원에 사둔 집이었는데, 비워둔 지 오래되어 집 안팎에 잡초가 무성한 상태였다.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이 근처로는 얼씬도 하기 무섭다며 빨리 허물어버리라고 성화들이었다.

그러나 지은 지 40~50년 된 집들도 거의 대부분 사라지고 없는데 이 집은 지은 지 100여 년이 되었음에도 조금 기울어졌을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못 하나 친 곳 없이 1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둥이며 대들보가 맞물려 성한 채로 그 오랜 세월을 버텨온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지붕의 기와들도 별로 깨진 것 없이 여전한 것이 허물어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웠고 다시 수리한다면 두고 볼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즉시 김경남은 집을 수리하기 시작하였다. 조심스레 기와부터 줄을 따라 내려놓고 거중기(起重機)로 집을 뜨고 활차를 이용하여 집을 바로 세워 놓았다. 이때 난데없이 제비들이 쌍을 지어 날아들었다. 어느새 정주간 천정에 제비 둥지 3개가 들어섰고 안방에도 하나 더 생겼다. ‘풍수지리는 짐승들이 더 잘 안다고 하지 않는가?’ 풍수 좋은 집이라는 예감에 그는 마음이 흐뭇해졌다.

천정에 기와를 다시 얹으며 살펴보니 기왓장들이 어찌나 단단한지 지붕에서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았다. 혹 몇 장 끊어진 것들이 있어 개굴이나 곡간 지붕을 덮었던 기와 몇 장을 올려다 보충하며 원래 자리에 그대로 얹어보니 딱 맞아 떨어졌다. 벽도 흙벽으로 바르고 한지로 문풍지를 하여 전통 가옥의 옛 모습대로 복원해 놓으니 여름철에도 집안은 선선하였다. “‘토벽은 워낙 밖의 온도가 아무리 뜨겁거나 차거 워도 열 전달이 되지 않기에 여름이면 선선하고 겨울이면 따뜻합니다. 저 문에 바른 한지 역시 바깥 온도와 습도를 종이 자체가 처리합니다.” 김경남은 신나게 소개를 하였다.

집 앞에는 또 샘이 깊은 우물까지 있었다. 옛날에는 집을 지을 때 우물부터 파고 말뚝을 박았다더니 그 우물이 지금까지 마르지 않고 수심이 2m 이상으로 깊었다. 우물을 가셔내고 새롭게 시설을 설치, 전기로 샘물을 뽑아 주위에 늪을 만들고 우물가 주위에 수양버들까지 심어놓으니 한결 운치가 돋보였다.

백년 가옥을 수리하면서 김경남은 옛날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가슴 뜨겁게 느꼈다고 한다. 김경남은 근처에 사는 원 주인의 조카뻘 되는 사람을 통해 그 집의 내막을 상세히 알아보았는데, 1893년 조선의 이주민 박여근(朴如根)이라는 상인이 목수 한사람에게 맡겨 이 집을 3년 만에 완공하였는데 원목 홍송은 백두산에서 뗏목으로 실어 내렸고 기와는 조선에서 줄 배로 실어 들였다고 한다. 그 집 뒤로는 10년 후에 원 주인의 딸이 시집을 가면서 지어진 딸의 집이 있었는데, 이 역시 90여년의 세월을 기록하며 원 모습대로 서 있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집을 혼자만 두고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웠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을 방문하고 조상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 이 집을 중심으로 토벽집[土牆家] 13채를 짓고 500대 트럭 분량의 돌을 실어와 돌담을 쌓으면서 민속촌을 건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김경남은 2009년 5월부터 줄곧 이 민속촌 건설에 자금과 정력을 모조리 쏟아 붓고 있다.

김경남, 그의 그칠 줄 모르는 민속촌 건설에 대한 노력

김경남은 동생과 함께 집을 짓고 돌담을 쌓을 뿐만 아니라, 동북 3성을 돌고 한국에까지 나가 조선족의 민속 문물을 수집해 왔다. 민속 기물들을 모아 순수한 조선족 전통 농가 마을을 꾸미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오래전 ‘4대골안[四隊山谷]’에 갔다가 남몰래 묻어둔 석마돌이 생각났다. ‘4대골안’은 1930년대 초 ‘북간도 해란강 참안(北間島海蘭江慘案)’ 당시 일본 토벌대에 의해 처참히 유린당한 화현리의 14개 조선족 마을 중 ‘학교촌’이라 불리던 곳이다.

일본 토벌대에 의해 마을은 초토화되고 사람들은 총칼에 찔리고 불붙는 집안에 갇혀 잔혹하게 학살되었던 곳이다. 살아남은 촌민들은 나중에 그 피비린내 나는 고장을 떠나 이 백룡촌에 자리 잡았는데, 당년의 역사적 증거물 중 하나인 학교 앞에 서있던 수양버드나무를 파다 새 삶의 터전인 백룡촌 학교 앞에 심어 놓기까지 하였다.

당시 육중한 석마돌은 그대로 ‘4대골안’ 산중턱에 남아 있었는데 20년 전에 이 석마돌을 발견한 김경남은 ‘언젠가는 이 석마돌의 의미를 찾아볼 때가 올 것’이라는 생각에 남들 모르게 흙으로 깊이 묻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동생 김경택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그 석마돌을 찾아 보았으나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그 석마돌을 찾아냈으나 육중한 석마돌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안간힘을 써서야 겨우 나무 발구에 싣고는 조금씩 움직여가며 드디어 옮겨올 수 있었다.

김경남은 수소문 끝에 원 주인 집에서 마을의 한 가난한 집으로부터 나누어 받은 오지독을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내었다. 김경남이 찾아가 보니 윤기가 흐르고 무늬 양식까지 예쁜 고품격의 오지독 한 쌍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조상들의 지혜 및 기술과 재능을 전시하는 좋은 일에 쓰겠다고 도움을 청하니 주인은 애지중지 여기며 윤택이 흐르도록 닦아온 기물을 두말없이 내놓았다.

김경남은 또한 이웃 마을인 월청진(月晴鎮)의 첫 토기 장인이 아들에게 남겨준 지그릇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한달음에 찾아갔다. 역사를 따져보니 역시 100년도 넘는 토기였는데 가볍고 단단하며 보기에 자연스럽고 미감이 마음에 와 닿았다. 김경남은 월청진(月晴鎮)의 첫 토기 장인의 재능과 기술이 녹아 있는 이 지독을 몇 백 년이 지난 후에도 후손들이 볼 수 있도록 장인의 명함을 기록하여 민속촌에 영원히 보존해 두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이에 토기 장인 아들 역시 기쁜 마음으로 조상의 유물인 지독을 김경남에게 맡겼고 노인들이 쓰던 철 다리미와 물독까지 함께 무상으로 내 놓았다.

그러나 오래된 문물이 돈이 되는 줄을 알고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는 쓰지 않고 버리는 물건일지라도 김경남이 돈 주고 사겠다고 하니 엄청난 값을 불러 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김경남은 지난 일 년 동안 동북 3성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이주해버린 조선족 마을을 찾아 김치 움에 버리고 간 지그릇들을 파서 김치를 버리고 독을 가셔가면서 옛 기물들을 거둬들였다.

1994년경 한국의 장사꾼들이 조선족 마을을 돌면서 문물이 될 만한 것들은 죄다 값을 올려 거둬가는 바람에 별로 남은 것들이 없었다. 김경남은 인터넷을 통하여 한국에서 조선족의 민속 문물들을 경매에 붙인다는 것을 알고 한국에 나가 궤짝이며 놋그릇들을 도로 사들이기도 하였다.

새롭게 태어나는 조선족 민속 부락

백년부락을 건설하면서 김경남은 본격적으로 문물 수집에 나섰지만 워낙 30년 전부터 문물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지라 지금껏 크고 작은 옛 민속 기물들을 근 500점 가량 소장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연변의 가을’ 민속절 농가락(農家樂) 행사와 함께 9월 16일자로 대외에 개방하면서 전부 백년부락에 진열하여 전시하고 있다.

“참 알고도 모를 일입니다. 지그릇들도 어떻게 구웠는지 오래된 것일수록 가볍고 단단하고 자연스럽고 예쁩니다. 현재의 것도 화려하고 예쁘지만 그것이 마음에 와 닿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옛날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슬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탄복이 갑니다. 후대들이 이런 문물들을 보면서 사색할 수 있게 하고 계발(啓發)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김경남은 사뭇 진지하게 소감을 피력하였다. “이 재부는 저 혼자의 몫이 아닙니다. 촌민들과 함께 운영하고 함께 혜택을 나누겠습니다.”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면 해외에서 벌어온 돈만으로도 얼마든지 충족하게 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김경남이 이 백년부락에 모든 재력과 정력을 쏟아 붓는 데는 그로서의 이유가 따로 있었다.

김경남은 백년 전통 가옥을 중심으로 조선족 민속 부락을 세움으로써 민속 문화 관광의 차원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숨결을 느끼게 하고 싶어 했다. 또한 우리 후대들이 전통 농가 생활을 체험하면서 민속에 대한 이해와 보다 많은 풍속, 예의범절을 배워 알게 함으로써 민족적 정기를 살리고자 했다.

김경남은 백룡촌의 5개 촌민 소조에서 각기 백년부락의 집 한 채씩을 맡아 순대, 두부, 떡과 같은 민속 음식들을 만들어 찾아오는 관객들에게 제공하도록 하였다. 앞으로는 모든 음식들에 무공해, 녹색 유기농으로 생산한 농산물을 쓰고, 생태 자원을 복구함으로써 관객들은 이곳에서 전통 민속 음식을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제조 과정과 기술을 직접 관람·체험하도록 할 것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 가마도 걸어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떡과 주먹밥도 제공해 주면서 풋풋한 인정이 살아 숨쉬는, 사람 사는 동네의 진풍경을 연출할 계획이다. 물론 여기에서 생기는 수익은 각 촌민 소조의 몫으로 돌려지게 된다.

떠나간 발걸음을 다시 백룡촌으로

백룡촌월청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관심을 갖는 촌민들 또한 열심히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이 민속 문화 관광 사업은 꼭 잘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민속 문화 관광업이 흥성하여 각 촌민 소조의 수입이 높아지고 촌민들마다 실제 혜택을 보게 된다면 마을을 떠났던 촌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하는 데 일조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김경남은 지금 너도나도 고향을 떠나 도회지로, 외국으로 나가다보니 본 마을 학교는 없어지고 월청진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백룡촌과 이웃 2개 촌을 합해도 9명뿐이라며 깊이 탄식한다. 민속촌 건설로 눈코 뜰 새 없이 보내면서도 김경남은 자가용으로 3개 마을 아이들의 등교를 도맡아 오고 있다. “아저씨가 좋아요”라고 연신 이야기하는 아이들이 응석을 부리고 재롱을 피우면 차안은 온통 웃음꽃으로 피어난다. 이 순간이 김경남에게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행복한 순간이라고 한다.

“지금 대개는 아이들 학교 때문에 시내로 들어가는 집들이 많고 또 돈벌이를 떠나는 집들이 있으나 결국은 환경 때문이지요. 어떻게 하던 우선 환경을 변화시켜야만 귀향에 도움이 되는 겁니다. 선진 국가에서는 부자일수록 농촌으로 가는데 우린 못살면서 도시로 들어가니 이것은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국면을 타개하려면 누군가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나부터라도 한번 나서보자고 생각한 겁니다. 좋은 풍속 한 가지라도 더 개발하고 석자 깊이 땅을 파서라도 좋은 문물을 발굴할 것입니다.”

김경남은 백년부락 민속촌을 건설하면서 도문에 잡았던 주거지를 아예 이 민속 부락에 옮겨와 살고 있다고 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곁에 와 살아야지요.” 말끝을 흐리며 저도 몰래 한숨을 짓던 그의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글썽하게 맺혔다.

“저는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해외 노무 생활을 하다 보니 부모님의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한 죄로 구척 사나이가 울고 있었던 것이다. “늘 말이 없던 아버지, ‘4대골안’에서 백룡촌으로 내려올 때 자두나무를 뿌리 채 옮겨다 싹을 키워 집집마다 나눠주시던 아버지, 봄이면 온 마을은 자두 꽃으로 단장하고 가을이면 집집마다 자두 열매를 따서 시장에 내다 팔아 생활 보탬을 하던 그날이 생생하다“고 하였다. 김경남은 또 “어머니 또한 남을 돕는 일을 천성으로 행해오시면서 자식들의 본보기로, 마을의 어머니로 올곧게 살다 가신 분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상여를 메는 옛 풍속 같은 것도 개발해 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자기를 낳아 키워 준 부모님이 세상을 떠도 풍속 습관을 몰라 인사도 바로 하지 못하는 폐단이 있는가 하면 되는대로 차에 실어 보내기도 하는데 참 안됐지요.”김경남은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쭉 살펴봐도 노인을 존중하고 가정이 화목한 집안이 잘 된다고 하면서 우리 전통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그는 8㎡는 더 될까 싶은 통 참돌을 실어다 효도석(孝道席)으로 가공하고 있었다. 마을에서 노인을 공경하고 진심으로 부모들의 제사를 잘 챙기는 효심 깊은 자식들을 물색하여 이 효도석을 사용하면서, 얼마간 무상으로 숙식을 해결하며 생활할 수 있도록 할 것이란다. 김경남은 자신이 못다한 효도를 다른 사람이 하는 이런 방식으로라도 장려하고 싶다고 토로한다.

제2의 전성기를 시작하는 백룡촌

김경남은 타향살이 10여 년에 고향 산천과 고향 사람들을 잊어 본 적이 없다. 백룡은 워낙 전설이 풍부한 고장이었다. 먼 옛날 두만강 건너 조선함지산에 청룡과 백룡(白龍)이 함께 살았는데 사춘기에 이르러 청룡이 백룡에게 청혼을 하자 부끄러워진 백룡이 두만강을 건너 이 마을 앞  ‘도래굽이’에 와 쉬어갔다고 하여 이 마을을 ‘백룡촌’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고향의 전설 또한 하나의 재산이고 자랑이었다. 김경남은 전설이 깃든 이 고향땅을 더욱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아름답게 건설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정열과 사랑을 바쳐 민속 창업의 새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고 있다.

김경남은 이야기한다. “먹고 살기 어려운 때를 지나 여유가 생기면서 자연히 주위를 살펴보게 되고 민족에 대해서도 두루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조선족은 그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이 땅을 지켜내었고 또 소를 팔아서까지 자식 공부시켜가면서 대를 이어 이 나라 이 땅의 주인으로 떳떳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민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민족 앞에 내가 해야 할 일 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10여 년 간의 해외 노무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4년간 여러 가지 고민을 하며 사회 조사를 하는 동안 나는 셋집살이에 전기밥솥 하나, 침대 하나 달랑 놓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나를 두고 형제들도 모두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왔다고 혀를 찼습니다. 그러던 중 2009년부터 동생이 고향 마을에 사놓은 100년 이상 되는 전통 가옥을 수건하면서부터 저의 민속 창업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입니다. 지금까지 이 백년부락을 건설하는 데 200여 만 원이 투입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백 년 전 우리 선조들이 살던 그대로 지어놓은 옛 장터, 소 양간, 철공소, 우물 등을 포함한 총 13채의 전통 가옥들이 들어섰습니다.”

2010년, 전국 민족사무위원회 전임 주임 이덕수(李德洙)는 이 민속촌 백년 가옥의 ‘까래 구들’에 올라서더니 이토록 훌륭한 전통 가옥을 오랜만에 본다며 신명나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다. 민속촌의 개업을 앞두고 리덕수는 친히 ‘중국 조선족 백년부락(中國朝鮮族百年部落)’이라는 글을 써주면서 김경남씨의 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농촌 테마파크 백년부락은 이렇게 탄생된 것이다.

참고문헌
  • 정매화·심혜숙, 『연변 조선족 마을과 건설 모식』(연변대학 출판사, 2009)
  • 정희숙, 「소수 민족 생태 문화 보호와 문화 산업 연구-두만강 조선족 집거 촌을 사례로」(중앙 민족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0)
  • 인터뷰(백룡 고택 주인 김경남, 남, 62세, 2011. 8. 6)
  • 도문시(http://www.tumen.gov.cn)
  • 중국 조선족 백년 부락(http://www.zoglo.net/search/res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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