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민족 운동의 요람, 명동촌

한자 抗日 民族 運動의 搖籃, 明東村
중문 抗日民族运动的摇篮——明东村
분야 역사/근현대|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지신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간도로 향하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탐욕스런 시선

19세기 초중반은 서양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간섭으로 중국 대륙과 한반도, 그리고 이웃한 일본이 알 수 없는 정치적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중국에서 상품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밀고 들어오는 영국 세력에 맞서 벌인 두 차례의 전쟁, 즉 아편 전쟁[1839~1842]과 애로호 사건[1856~1860]으로 중국은 정치적으로 심한 몸살을 앓았고, 국력이 급격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는 중국의 정치적 수세를 이용하여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흑룡강[아무르강(Amur River)] 유역과 지금의 연해주 일대를 차지하며 중국과의 국경을 확정짓는 정치적 행보를 걷고 있었다.

한반도의 상황 또한 점차 어려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병인 양요[1866]·신미 양요[1871] 등 서양 세력의 침투가 빈번해졌고, 이어 일제에 의해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1876]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화파와 척사파의 대립, 갑신정변[1884], 청일 전쟁[1895]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의 운명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치적 불안은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수탈로 이어졌고, 가뭄과 기근 등의 자연 재해가 겹치면서 특히 북부 지역의 조선인들은 만주와 연해주로의 월경과 이주가 빈번해졌다. 그로 인해 압록강두만강 유역, 그리고 연해주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수십 개의 조선인 정착촌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김약연(金躍淵)의 명동촌(明東村) 개척

2011년 8월 한 여름에 찾은 두만강 유역의 조선족 마을들은 따가운 햇볕 아래 생기가 넘쳐났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두만강을 따라 100여 년 전 이 땅을 밟은 한민족의 후예들이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다. 마치 시간이 멈춰서 버린 듯 두만강 유역 조선족 마을은 평온 속에 묻혀있다. 비록 젊은이들이 객지로 떠나 마을은 고즈넉하지만 풍성함과 여유로움은 두만강 너머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모름지기 나라님이 나랏일을 잘 보아야 백성이 살기가 편한 법! 등 따뜻하고 배부른데 어느 누가 그것을 마다하고 제 고향을 등지려 하겠는가! 두만강 너머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100년 전에 정든 고향을 등지고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들어갔을 우리네 조선인들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19세기 중반부터 중국 동북 지역과 연해주 지역으로 한인들의 이주가 이어졌다. 동북 지역에서는 압록강두만강 유역을 따라 명동촌(明東村)·장재촌(長財村)·삼합촌(三合村)·백룡촌(白龍村) 등 많은 조선인 정착촌들이 형성되었다. 물론 연해주에서도 지신허(地新墟)·연추(延秋) 등의 수백 개의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두 지역에서 조선인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그 중 김약연의 이주와 명동촌의 이야기는 동북 지역 조선인 이주 개척사에서 독특하면서도 독보적인 역사적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1899년 2월, 조선회령 출신의 김약연(金躍淵)[1868~1942]이 전주 김씨 가문 31명과 김하규(金河奎) 가문 63명, 문병규(文秉奎) 가문 40명 등, 총 22세대 142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넜다.

김약연 일행은 장재촌에 정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땅을 일구고 마을을 가꾸어 나갔다. 이주 직후 1901년 김약연은 용암동[지금의 명동]에 규암재(圭巖齋)라는 서당을 열었다. 김약연은 마을 주민들과 한 몸이 되어 마을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김약연은 마을의 지도자로서 장재촌과 이웃 마을인 명동촌을 지도해 나갔고, 그곳에서 조선인들의 희망을 보기 시작했다.

당시만해도 명동촌은 몇몇 조선인들이 사는 평범한 이주민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19세기 중반부터 조선인들은 꾸준히 압록강두만강을 넘었고, 여기저기서 소리 없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다.

장재촌에도 명동촌에도 앞서 들어왔던 조선인 무리들이 있었다. 하지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김약연의 존재도 장재촌명동촌의 존재도 아직은 역사의 뒤편에 가려져 있었다.

김약연은 유학자이자 세상을 볼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를 일깨운 것은 시대적 어려움, 즉 일제에 의해 초래되기 시작한 조선의 위기였다. 1905년 일제의 무력 위협으로 맺어진 을사 늑약은 김약연의 선각자 본능을 일깨웠다. 김약연은 스러져 가는 한반도조선의 운명에 가슴 아파하며 깨어있는 선각자 정신으로 무장하고, 오로지 교육만이 조선을 외세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길이라 보았다. 김약연은 이주 직후 세웠던 규암재 서당을 중심으로 주민들에 대한 교육을 통해 ‘동쪽을 밝게 한다’, 즉 조선을 밝게 한다는 일념으로 교육 사업에 혼혈을 기울여 나갔다.

이주 개척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마을, 명동촌

명동촌의 명칭은 ‘동쪽을 밝게 한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김약연의 교육을 통한 계몽 운동의 의지를 강하게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1890년대 말 김약연 일행을 중심으로 용정시 지신진에 새롭게 조성되어 나간 ‘새 조선인’ 마을 장재촌명동촌은 조선인 사회의 등불이자 교육 입국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 나갔다.

이러한 명동촌의 역사적 행보는 비록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1873년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에 조성된 한인촌(韓人村)[개척리(開拓里), 1911년 신한촌]의 경우와 유사하다. 명동촌이 이주 초기 항일 구국 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하며 그곳에서 항일 운동의 불길이 달구어졌던 것처럼, 한인촌 또한 집약되어 온 역량을 기반으로 을사 늑약 이후에는 항일의 횃불을 밝히는 데 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한인촌은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아무르만 기슭에 새로운 정착촌인 신한촌으로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거주지였다.

명동촌장재촌·이호동·동구·용암촌·수남(水南) 등의 10여 개 마을을 합친 총칭이라 할 수 있다. 용정시에서 30리 떨어진 약 15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지신향 명동촌은 김약연의 고향인 회령에서 북으로 40리, 지신진 소재지 달라자[달라즈, 대랍자(大拉子)]에서 7리 떨어진 곳에 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장재촌명동촌이 자리 잡고 있는데, 명동촌 동쪽에는 장재촌으로부터 선바위에 이르는 뒷산이 동구에서 용암촌 뒷산으로 이어져 중영촌·상촌 앞산[삼원봉(三元峰)]까지 이어진 산맥으로 둘러져 있다. 마을 중간은 남에서 북으로 육도하(六道河)가 흐르고, 강 서쪽의 대사동·소사동 마을은 높은 산맥으로 둘러싸인 남북 10리, 동서 5리나 되는 아늑한 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과거의 화려했던 명성은 지금 찾아볼 수 없지만 그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을 입구에는 명동 교회가 서있고, 그 옆에 윤동주(尹東柱)의 생가가 주인을 기다리 듯 외롭게 객들만 맞이하고 있다. 소년 윤동주가 명동의 푸근한 인정 속에서 문학도의 기질을 닦아 나간 곳이다. 윤동주의 28세 생애의 절반이 묻혀 숨 쉬던 곳, 바로 명동촌이다.

마을은 작은 구릉지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주변은 온통 옥수수밭으로 둘러쳐져 있다. 명동촌은 15만원 탈취 사건 등과 같은 역사적 사건뿐만 아니라, ‘선바위’, 「부채 바위와 꽃사슴」 등과 같은 많은 설화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일제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동시에 약소 민족이 맛보아야 했던 시대적 아픔 때문이기도 했다.

근대 교육의 선구자 김약연, 명동촌의 ‘대통령’으로 우뚝 서다!

다시 김약연 일행의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1899년 2월에 김약연 일행에 의해 외부에 더 크게 알려지게 된 명동촌은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조선인 사회의 중심으로 성장해 나갔다. 김약연규암재 서당 외에도 김하규는 대사동에 소암재, 남위원은 중영촌에 한함서재 등을 열었다. 이렇듯 명동촌은 근대 교육과 항일 계몽 운동을 통해 항일 의식을 고취해 나갔고, 그로 인해 명동촌은 학문적, 사상적으로 항일 운동의 본산지로서 성장해 나갔다.

하지만 일제는 명동촌의 성장과 지식인들의 활동을 좌시하지 않았다. 1907년 일제는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 하에 용정에 조선 통감부 간도 파출소[이하 간도 파출소]를 건립했다. 이어 명동촌 주변인 종성 대안의 하천평(下泉坪)·호천가, 회령 대안인 우적동·조양천 등지에 헌병 분견소를 설치했다.

1909년 9월 간도 협약 이후에는 용정·두도구·혼춘 등지에 영사관과 분관을 설치하고 조선인 사회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에 김약연은 1908년에 곳곳의 서당들을 통합하여 명동 서숙으로 확대하고 근대 교육과 항일 교육을 강화해 나갔다.

명동촌이 보다 근대적인 교육과 신진 사상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김약연정재면(鄭載冕)의 만남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를 받아들이면 우수한 교사진을 제공하겠다는 정재면의 제안은 김약연뿐만 아니라 명동촌과 이웃한 장재촌 등, 주변 조선인 사회에 충격적이고도 파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김약연은 주저 없이 미래의 명동촌과 거주자들의 밝고 새로운 세상을 먼저 생각했다. 1909년 김약연은 신민회(新民會) 회원이었던 정재면의 권유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유학이라는 낡은 구습과 사상을 던져버렸다. 나아가 명동 서숙을 명동학교로 개칭하고, 박태현·장지연(張志淵) 등의 우수 교원을 충원하는 한편, 명동 교회 설립을 통해 진보적이고 근대적인 교육을 통해 인재 양성에 힘써 나갔다. 그밖에도 김약연은 명동 여학부를 개설하여 여성들의 근대화에도 힘썼다.

당시 명동촌의 위상은 연변뿐만 아니라, 연해주와 북만주에서도 유학생을 파견할 정도로 대단했다. 이는 당시 중국이나 일제가 기독교 불간섭 정책을 취하고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그 후 1910년 3월 김약연간민 교육회를 조직했다. 그는 간민회(墾民會)의 회장직을 수행하며 명동촌명동학교의 성공 사례를 주변 지역에 보급하면서 항일 인재 양성과 독립운동에 혼신을 다했다.

김약연은 신민회 회원 정재면, 후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李東輝)[1873~1935]와 김립(金立)·이동춘(李同春)·장기영(張基永) 등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또한 김약연은 여러 지식인과의 교류를 통해 명동촌을 근대적인 교육 입국의 창구로 변모시켜 나갔다. 윤동주의 외삼촌이었던 김약연은 그렇게 용정과 명동촌의 선구자이자 정신적인 ‘북간도 대통령’으로서의 행보를 계속해 나갔다.

일제의 탄압에 맞선 명동촌 사람들-3·13 항일 시위 운동

김약연명동학교[이후 명동 중학]는 항일 교육의 요람과 기지로 성장해 나갔다. 이러한 배경에는 1910년 조직된 간민 교육회 시기부터 명동촌을 비롯한 조선인 사회가 중국 국적에 가입하면서 일제의 간섭 여지가 배제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명동촌김약연의 훌륭한 리더쉽으로 지방주의나 파벌 모순은 없었다. 또한 주변 지역이나 학교들인 와룡동(臥龍洞)의 창동 학원, 후동촌의 정동 중학, 소영촌의 길동 학교와의 연계도 좋았다.

하지만 명동촌명동학교와 명동 여학교, 간민회간민 교육회, 그리고 와룡동의 창동 학원, 후동촌의 정동 중학, 소영촌(小營村)의 길동 학교를 통한 근대 교육과 계몽 운동은 일제에게는 눈의 가시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한편, 1919년 들어 연변 조선인 사회는 거센 일제의 탄압의 회오리 속에 갇히고 말았다. 3·13 항일 집회와 시위 운동, 그리고 1920년 1월, 윤준희(尹俊熙)·임국정(林國楨)·한상호(韓相浩)·최봉설(崔鳳卨)·박웅세(朴雄世)·김준(金俊) 등의 열혈 청년들에 의한 15만원 탈취 사건 등으로 명동촌은 일제의 가장 큰 탄압의 타켓이 되어 갔다.

1919년 2월 12일, 김약연을 중심으로 한 간도 대표단이 러시아연해주의 니콜스크-우수리스크(Nikolsk-Ussurisk)[현재 우수리스크]에 파견되어 대한 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서 발표되는 독립 선언서를 기다렸다. 그런데 서울에서 3월 1일에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자 이 소식을 들은 간도에서도 간도 대표단의 독립 선언서를 기다리지 않고 3월 13일에 용정에서 모여 반일 대 집회와 시위를 진행했다.

명동학교에서도 주변의 정동 학교와 연합하여 300여 명의 충렬대(忠烈隊)를 조직했고, 용정 시내에서 앞장서서 시위를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일경들의 무장 진압으로 19명이 희생되고 48명이 부상을 당했다.

1919년 3·13 항일 시위 운동은 간도 조선인의 가슴을 들끓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20년 1월에는 윤준희·임국정을 비롯한 청년 6인이 조선 총독부조선 은행 회령 지점에서 용정 지점으로 수송되는 30만원을 탈취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15만원 탈취 사건 또한 거사 당일 청년들의 동선은 명동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1920년 1월 4일 아침 8시, 청년들은 명동촌을 떠나 도중에 유익하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어 눈길을 헤치고 동량 어구에 도착한 후 날이 어두워지자 주변의 중국 음식점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두 개 조로 나누어 매복에 들어갔던 것이다. 현금 수송대의 동선은 명동촌 주변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명동촌을 비롯한 주변 조선인 마을들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어 갔다.

한편, 명동촌은 간도 국민회 건립 이후에는 남부 총회의 본부가 되었고, 명동학교는 총부 사무실로 이용되었다. 총회에서는 『독립 신문』·『우리들의 편지』 등을 발간하여 민중들의 반일 사상을 고취했다. 이에 일제는 명동촌명동학교를 ‘불령 선인의 소굴’로 간주하고 탄압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1919년 3월 21일, 명동촌의 지도자 김약연이 연해주에서 돌아오자 일본 경찰은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중국 국적자로서 당국에 의해 2년간 연금이 되어 있었던 관계로 일제의 체포망을 피할 수 있었다.

명동촌을 휩쓸고 간 경신 참변의 참화들

일제의 1894년 청일 전쟁과 1904년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는 동아시아의 모든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가져다주었다. 일제는 침탈 야욕을 드러내며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의 근현대사를 피로 물들여 놓았기 때문이다.

1920년 9월~11말 기간에 일제는 혼춘 사건과 이를 빌미로 마침내 간도 출병을 단행했다. 그런데 일제가 주도했던 혼춘 사건과 간도 출병은 무수한 양민들의 터전과 목숨을 앗아가는 경신 참변을 야기시키고 말았다.

그런데 간도에서의 경신 참변은 그 보다 바로 앞서 연해주에서 발생했던 4월 참변[경신 참변]의 연속선상에서 자행된 대사건이었다. 그 배경을 잠시 들여다보면,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 극동-시베리아 내전[1918~1922]에 참전했던 일제는 1920년 3월, 하바로프스크 북동부의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Nikolaevsk-na-Amure)[니항(尼港)]에서 러시아-한인 빨치산 연합군에 의해 참패를 당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20년 4월 초 일제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일대에서 한인 집거지들을 중심으로 학살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일제는 명동촌과 용정을 비롯한 간도 조선인 사회에 대한 탄압과 중국 대륙을 지배하려는 과대망상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일제는 1920년 10월 중순~11월 말 기간 에 2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연변 각지와 남만주, 장백현 지역에서 조선인 집거지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 만행, 즉 경신 참변을 저질렀다.

명동촌 또한 일제의 학살 만행을 피해가지 못했다. 일제는 10월 15일부터 명동촌에서 14명을 체포하고, 명동학교와 남부 지방 총 회장 마진의 집을 불태우는 등 방화와 학살 만행을 저질렀다. 이 무렵 일제의 만행으로 방화되거나 학살당한 간도 조선인 사회의 집거지와 조선인은 수백에 달했다. 그로 인해 20년 가까이 온 마을민들이 건설해 왔던 명동촌의 항일 운동 기지로서의 기반은 무너지고 말았다.

1920년 경신 참변 기간 동안에 일제가 연변 각지에서 행한 무자비하고 반인륜적인 학살 만행은 오랜 세원이 흘렀건만 쉽게 잊혀 지지 않고 있다. 일제에게 있어서 극동에서의 학살 만행은 이어서 있게 될 간도에서의 학살 만행을 위한 예행 연습에 불과했던 것이다.

과거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다시 깨어나는 명동촌!

20세기를 전후한 근현대시기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일제의 대륙 침탈 야욕과 더불어 붉게 물들고 말았다. 1904~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제의 승리는 잘못된 과욕을 심어주었다. 그 과욕은 결국 1945년 8월, 두 차례의 원자 폭탄 투하와 수십만 명의 죽음과 고통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한반도 강점[1910]과 시베리아 내전 참전[1918~1922], 다시 만주 사변[1931]과 중일 전쟁[1937]으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일제의 끝없는 대륙에 대한 야욕과 침략, 학살 만행은 계속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중국 동북 지역 200만 조선족과 독립 국가 연합 45만 고려인의 역사는 바로 일제의 대륙 침탈이라는 슬픈 기억과 아픔으로 점철되어 있다. 명동촌은 그런 측면에서 역사적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이제 명동촌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2011년 8월 명동촌은 조용했지만 생기가 일고 있었다. 마을 한켠에서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서 명동학교가 복원되고 있었다. 발견된 명동학교의 설계도를 기반으로 옛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윤동주 생가에는 외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온 탐방객들이 생가 마당에 서서 사진을 찍거나 시인의 명작 「서시」를 읊조리며 그의 삶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명동 교회와 뜰에는 김약연 선생과 그를 둘러 싼 눈물겨운 이야기와 증표들이 교회 마당과 교회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2009년에 용정시명동촌을 민속촌으로 지정하고, 그 사업의 일환으로 명동학교 복원 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는 가운데, 향후 명동 교회 등 다른 유적지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쉽게 잊혀 질 수도 있었던 명동촌 사람들의 이야기, 즉 명동촌 역사의 퍼즐 조각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명동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2011년 6월에 한국인천의 한국 이민사 박물관에서는 개관 3주년 기념 특별전으로 6월 10일부터 8월 7일까지 2개월 간에 걸쳐서 ‘동방을 밝힌 등불,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이라는 주제 하에 명동촌 특별전을 갖기도 했다.

특별전에는 지금까지 발굴된 초기 조선인의 이주 과정 및 명동촌의 형성 과정뿐만 아니라, 마을의 가옥, 결혼, 장례 등의 생활문화, 윤동주·나운규(羅雲奎)·문익환(文益煥) 등 명동촌 출신의 인물들, 그리고 최근의 마을 모습과 명동학교 재건 모습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연변 조선족 이주 개척사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곳, 명동촌. 명동촌은 조선족 역사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해외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역사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자랑스런 한민족의 유산, 명동촌. 아끼고 잘 가꾸어 후대에 아름답게 물려주야만 한다.

참고문헌
  • 십월 혁명 십주년 원동 긔념 준비 위원회, 『십월 혁명 십주년과 쏘베트 고려 민족』해삼위 도서 주식회사(크니스노예뎰로), 1927
  • 김춘선 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연변인민출판사, 2009)
  • 김춘선·김철수, 『중국조선족통사』상 (연변인민출판사, 2009)
  • 독립기념관,『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 투쟁』49권(2010)
  • 백민성, 『유서깊은 해란강반1』(연변인민출판사, 2001)
  • 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문사자료 위원회, 『연변문사자료휘집』1(연변인민출판사, 2007)
  • 전광하, 박용일, 『세월속의 용정』(연변인민출판사, 2002)
이전 TOP